범죄와의 전쟁 (2012년 한국영화)
9. 고대적 습성의 보존
유한계급이라는 사회 제도(관습)는 사회 구조뿐만이 아니라 그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 개개인의 특징까지도 변화시킵니다. 어떤 관념이 사회의 주류적 규범으로 자리잡으면 사람들은 그 규범을 따르려고 노력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습관적인 사고방식이 나타나고, 더 나아가서는 그 규범에 맞는 성향을 가진 사람들만 많이 살아남아 자손을 퍼뜨리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도태됩니다. 전술된 바 있는 금전적 경쟁의 관행이나 산업사회에 있어서의 예외적 관행 또한 그에 걸맞는 인간형을 양산합니다. 환경은 관습을 만들고 그 관습은 인간을 바꾸게 되며, 그것이 사회의 진화입니다.
유럽의 경우 이러한 진화에서 살아남은 세 종족은 장두 금발족, 단두 흑발족, 지중해족이라고 합니다. (이 셋중 장두 금발족이 가장 약탈을 좋아하는 기질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각각의 족속은 호전적이고 경쟁을 좋아하며 가오를 세우기 좋아하는 스타일과 평화를 사랑하고 협동하며 실리를 추구하는 스타일로 나뉩니다. 후자의 평화적 성향은 약탈문화가 나타나기 전인 매우 먼 옛날에 생겨나서 지금까지 주로 경쟁에서 패배한 사회적 약자들 사이에서 명맥을 이어 왔던 성향인 반면, 호전적, 경쟁적 성향은 약탈문화가 나타난 이후 생겨났기때문에 비교적 최근에 생긴 습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옛날이라고 그렇게 평화로왔을까 하는 의문이 드네요. 사실 서로를 밟고 올라가려는 습성은 파충류시절에 생긴 R-complex의 영향이라 알고 있었거든요) 현재는 약탈문화로부터 형성된 인간형이 주류가 되고 있지만, 이런 호전적, 경쟁적 성향은 상대적으로 새롭게 생긴 성질이기때문에 아직까지 불안정한 측면이 있다고 합니다. 더 옛날에 생긴 평화적, 협동적 성향은 그만큼 더 안정되어 있고, 특별한 계기가 마련되면 인간은 다시 이 고대의 평화적 성향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는데, 이는 산업화 사회의 도래로 현실이 되었습니다. (산업화 사회에서는 평화적, 협동적 성향이 필요할테니까요)
사실 사이좋게 나누고 두루 공감하는 선한 성격은 사회의 유지 발전에 도움은 되지만 경쟁사회에서 개인의 성공에는 별로 도움이 안됩니다. 제 잇속 잘 차리면서 때로는 양심에 거리낄 행동도 하고 속일줄도 알아야 금전적 경쟁의 문화에서 성공할 수가 있습니다. 종족 단위로 보면 유럽의 장두형 금발민족이 특히 그러한 약탈적 속성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번성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로부터 내려온 이러한 선한 성격은 사회의 유지발전에 도움이 되기때문에 완전히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산업사회 전) 경쟁 위주의 사회체제에선 나쁜 놈들의 전성시대가 이루어지고, 또한 이러한 약탈적 속성이 강한 민족이나 국가가 승자가 됩니다. 그러나 산업화 사회가 되고 나면 개인과 사회의 성공모델이 달라지게 됩니다. 개인단위에서는 여전히 나쁜짓을 요령있게 잘 하는 게 성공에 중요했지만, 집단적 측면에서는 상호간 투쟁보다는 협력이 더욱 중요해지면서 이에 맞는 자질 - 정직, 근면, 선의, 이타, 합리적 사고방식 - 을 또 필요로 하게 됩니다. 이러한 자질들은 사회적 측면에서는 도움이 되지만,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경쟁사회에서 개개인의 성공에는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현대의 경제 제도가 금전적인 그것(돈벌이)과 산업적인 그것(생산)으로 나눌 수 있는 것처럼, 직업 역시 소유 계열과 생산 계열로 분류해 볼 수 있습니다. 소유 계열의 직종은 유한계급의 차지입니다. 유한계급이 되려면 금전적, 즉 소유 계열의 일을 해야 합니다. 경쟁자를 이기고 그의 것을 빼앗는 약탈적인 스킬이 이러한 소유 계열의 일에는 필수적입니다. (이게 독점자본가가 하는 일이긴 하죠) 이들은 (생산적인 노동에는 종사하지 않고) 자기가 가진 많은 자산을 교환(투자)하여 그 가치를 불리는 것에 주력합니다. 전근대적 약탈사회에서처럼 폭력을 쓸 수는 없지만, 평화적인 방법으로 타인을 잘 속여넘기는 데 능숙해야 소유계열의 업에서 성공할 수 있습니다. 직원들이나 노동자들은 근면성실한 스타일이 선호되지만, 최상층 자본가들이나 자산가들이 되려면 수단방법 안가리는 수완이 요구됩니다. 위계상으로 보면 사회에서 제일 인정받는 직업은 소유계열의 직업입니다. 두말할 필요없이 자산가(갓물주)가 최고이며, 자산가에게 자금을 대거나 경쟁자와의 분쟁에서 이기게 해 주는 금융, 법률 관련 직업이 그 다음입니다. 상업은 중간 정도 지위를 차지하고, 노동자들은 별로 알아주지 않습니다.
적자생존의 진화과정을 거치면서 유한계급의 구성원은 계속 바뀝니다. 그리고 역사가 흐르면서 그 선별기준도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야만시대 초기에는 용맹함과 공격성, 무자비함이 부를 쌓고 유한계급이 되는 중요한 요건이었지만, 후기 야만시대에 들어와서는 대놓고 폭력을 쓰는 것보다는 평화롭게(?) 속임수를 잘 쓰고 매사에 신중한 인간이 유한계급이 되기가 더 쉬워졌습니다. 현대 자본주의에 사회에 있어서도 여전히 후자의 능력이 유한계급의 능력으로서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지만, 야만문명 초기의 약탈적 습성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닙니다. (사냥꾼이 사냥감을 끈질기게 노리듯) 목표를 달성하려는 집념(Grit?)은 이러한 약탈적 습성의 흔적이며 오늘날에도 생존과 번식에 필요합니다. 또한 과시적 여가나 과시적 소비의 경우 (남을 찍어 누르려는) 약탈적 습성이 더욱 크게 발현되며, 사회의 모든 계층이 쩐의 전쟁을 해야 하므로 하층계급에도 약탈적 습성은 발견됩니다. 게다가 인간들은 항상 위만보고 살기 때문에 유한계급의 약탈적 속성을 늘 후천적으로도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배우고 모범으로 삼게 됩니다. 돈을 버는 직종과 생산하는 직종이 함께 존재하는 세상이기때문에 전자에 적합한 약탈적 속성과 후자의 적합한 협동적 속성은 오늘날 우리들 안에 혼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