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기한만료 웹소설] 제1부. 서랍 속의 30년, 그리고 180일의 카운트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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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기한만료 웹소설] 제1부. 서랍 속의 30년, 그리고 180일의 카운트다운
[혼인기한만료 제도를 어떻게 생각하시는가요?]
“귀하의 혼인기한이 6개월(180일) 후 만료됩니다.”
이혼 소송도, 진흙탕 싸움도 필요 없다!
30년이 지나면 부부 관계가 자동으로 소멸되는 세상.
갱신할 것인가, 우아하게 끝낼 것인가?
평생을 바친 내조 끝에 마주한 ‘계약 만료’의 날.
당연한 듯 ‘갱신 서류’를 요구하는 가부장적인 남편 앞에
아내가 30년 동안 숨겨둔 서랍 속 진실을 꺼내 놓았다.
“아니, 내 30년 계약은 오늘로 끝
어느 순간부터 거리에 ‘돌싱’이라는 단어는 자취를 감췄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굳이 돌아온 싱글임을 유난스레 지칭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되었다. 이혼은 더 이상 인생의 오점이나 실패를 의미하는 주홍글씨가 아니었다. 흠결은커녕, 오히려 한 번쯤 겪어볼 만한 인생의 씁쓸한 통과의례이자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훈장처럼 여겨졌다.
결정적인 기폭제는 수년 전 이루어진 간통죄의 완전한 폐지와 귀책주의 이혼 소송의 한계였다. 외도를 저지르고도 당당한 배우자들, 법망을 교묘히 피해 가며 위자료 몇 푼으로 오랜 세월의 헌신을 조롱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부부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던 도덕적 책임감과 신뢰는 낡은 시대의 유물로 전락했다. 혼인의 의미는 탁류에 휩쓸린 듯 혼탁해졌고, 가족법원은 매일같이 서로의 밑바닥을 폭로하며 재산을 뜯어내려는 진흙탕 싸움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관성으로 유지되던 쇼윈도 부부, 서로를 투명 인간 취급하며 각자의 삶을 즐기는 무늬만 가족인 사람들이 거리를 메웠다. 사회적 비용은 천문학적으로 치솟았고, 결혼 제도 자체에 대한 회의감이 국가적 위기로 번졌다.
결국 국가는 극약 처방을 내렸다. 일명 ‘혼인기한제’.
결혼이라는 계약에 30년이라는 명확한 유통기한을 설정한 것이다. 부부가 합의하여 갱신하지 않으면, 그 어떤 소송이나 법적 분쟁 없이 혼인은 자동 소멸된다. 서로를 찌르고 할퀴는 지옥 같은 소송전 대신, 조용하고 우아하게 ‘끝낼 권리’를 국가가 보장해 준 셈이었다.
그리고 유난히 볕이 날카롭던 가을의 첫날 아침. 그 유례없는 법안이 마침내 현실의 궤도에 올랐다.
거실 벽면을 가득 채운 대형 TV에서는 아침 뉴스 앵커의 건조하고 또렷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늘 자정부터 개정된 혼인법에 따른 이른바 ‘혼인 30년 자동 만료제’가 본격적인 시행에 들어갔습니다. 혼인신고일 기준 만 30년이 되는 날, 부부 양측의 공동 갱신 합의가 관할 기관에 접수되지 않을 경우, 별도의 이혼 소송이나 법적 분쟁 없이 혼인의 법적 효력이 자동 소멸되는 제도입니다. 가족관계등록부에는 이혼이 아닌 ‘혼인기한 만료’로 기재되며, 이에 따른 재산 분할 가이드라인은……”
화면 속 앵커의 입술이 달싹이는 것을 무심하게 바라보던 강태석(60세)은 손에 쥐고 있던 리모컨을 최고급 가죽 소파 위로 툭 던지며 혀를 찼다.
“쯧, 별 시답잖은 법을 다 만들어서 사람 피곤하게. 안 그래, 여보? 나라가 할 일이 없으니 이제 남의 집구석 이부자리 사정까지 법으로 재단하려고 들어. 이것들이 아주 배가 불렀지.”
맨손으로 시작해 어엿한 중소기업을 일군 자수성가 사업가 특유의 오만함이 배어있는 목소리였다. 그는 탁자 위에 놓인 경제 신문을 거칠게 펄럭이며 불만을 토해냈다. 널찍하고 서늘한 대리석 식탁의 끝자리, 아내 미란(58세)은 태석의 질문에 대답 없이 그저 묵묵히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전복죽을 국자로 떠서 그의 앞에 놓아줄 뿐이었다.
30년이었다. 태석이 먼지 날리는 공장 바닥에서 기름때를 묻히며 밤을 새울 때도, 어음 결제를 막지 못해 부도가 날 뻔하여 사채업자들에게 시달릴 때도 미란은 늘 그 자리에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친정의 재산까지 몰래 끌어다 남편의 빈 곳을 메웠던 그녀였다. 그러나 태석은 언제부턴가 그런 미란의 헌신과 침묵을 당연한 ‘순종’이자, 흠잡을 데 없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아내의 맹목적인 ‘만족’이라고 여겼다. 기업이 자리를 잡고 돈이 넘쳐나기 시작하면서 태석의 밤은 밖으로 돌았지만, 미란은 단 한 번도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태석은 그것이 자신의 권위가 통제하고 있는 완벽한 평화라고 믿었다.
미란이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서며 잘게 떨리는 손을 앞치마에 닦아내는 것을, 신문 활자에 시선을 박은 태석은 끝내 알지 못했다.
같은 시각, 지은 지 30년이 다 되어가는 외곽의 낡은 주공아파트에서는 영희(57세)의 날카로운 잔소리가 묵은 아침 공기를 쩍쩍 가르고 있었다. 좁은 주방에는 된장찌개 끓는 냄새와 영희의 한숨이 뒤섞여 묘한 답답함을 자아냈다.
“여보! 내 말 듣고 있어? 오늘 퇴근하고 구청 갈 거니까 무조건 일찍 와요. 회식이고 나발이고 다 빼고 오란 말이야. 아우, 그놈의 법인지 뭔지 때문에 이게 무슨 생고생이야? 내가 당신 하나 믿고 평생 뒷바라지하면서 지지리 궁상떨고 살았는데. 이제 애들도 다 키워놓고 대출금 다 갚아서 숨통 좀 트이나 했더니, 구청까지 오가라 마라 사람을 들볶아!”
정년퇴직을 1년 앞둔 만년 부장 철수(59세)는 낡아빠진 서류 가방의 지퍼를 올리며 말없이 현관문을 나섰다. 그의 어깨는 무거운 솜이불을 뒤집어쓴 것처럼 굽어 있었다.
“어유, 저 답답한 양반. 사람을 세워놓고 대답 안 하는 것 좀 봐! 귀가 먹었어? 늦으면 알아서 해!”
영희가 닫히는 문을 향해 악다구니를 썼지만, 쾅 하고 문이 닫힌 직후 복도로 나선 철수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아니, 오히려 해방감을 목전에 둔 소년처럼 미세한 활기가 돌고 있었다. 그의 낡은 양복 안주머니에는 두 달 전 아내 몰래 도장을 찍어둔 보증금 천만 원에 월세 40만 원짜리, 10평 남짓한 소형 오피스텔의 임대차 계약서가 고이 접혀 있었다.
평생을 ‘가장’이라는 무거운 짐짝에 짓눌려 살았다. 박봉을 쪼개고 쪼개는 아내의 억척스러운 간섭 아래, 소주 한잔 마음 편히 마시지 못하고 숨죽여 살아온 그였다. 출근길 지하철 2호선에 몸을 싣고 한강 다리를 건너며, 철수는 차창에 비친 자신의 주름진 얼굴을 향해 태어나 처음으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온전한 나만의 공간, 내 마음대로 켜고 끌 수 있는 작은 TV, 눈치 보지 않고 누울 수 있는 좁지만 안락한 침대. 그 하나만을 바라보며 짐승처럼 버틴 30년이었다. 오늘 정오면, 그 지긋지긋한 족쇄에 공식적인 유통기한이 찍힌다.
“여보, 아 해봐. 간이 딱 맞네.”
한편, 신도시의 완벽하게 정돈된 최고급 타운하우스 주방. 아침 햇살이 차르르 쏟아지는 통창 너머로 잘 가꿔진 정원이 보였다. 주변에서 모두가 부러워하는 모범 가장이자 성공한 건축가인 정민(58세)은 갓 말아낸 따뜻하고 노란 계란말이를 아내 수진(56세)의 입에 쏙 넣어주었다. 수진은 눈웃음을 치며 정민의 넓은 어깨에 살포시 기댔다. 그녀의 한 손에는 방금 찍은 브런치 사진을 SNS에 올리기 위한 스마트폰이 들려 있었다.
“아주 나라에서 우리 부부 금실 자랑하라고 멍석을 제대로 깔아주네. 안 그래, 자기야? 우리 내일 아침에 구청 문 열자마자 가서 1등으로 연장 도장 찍고 올까? 인증샷도 남기고. 그 앞집 영수네 부부 보니까 벌써부터 남편이 연장 안 해줄까 봐 여자가 전전긍긍이더라. 세상이 참 각박해.”
정민은 사람 좋게 특유의 다정한 눈웃음을 지으며 수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당연하지. 내일 당장 반차 내고 같이 가자. 당신 예쁜 옷 입고 나와.”
하지만 그가 빈 프라이팬을 들고 싱크대 쪽으로 몸을 돌려 흐르는 물을 트는 순간, 그의 얼굴에서 미소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핏기가 가신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싱크대 하부장 서랍장 맨 밑바닥, 수진 몰래 10년 넘게 돌려막기로 갚아나가고 있는 엄청난 액수의 제2금융권 대출 변제 내역서와 빨간 줄이 그어진 이자 독촉장이 눈앞에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무리한 투자 실패로 시작된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었다.
문제는 갱신 절차였다. 기한을 연장하려면 부부 쌍방의 최근 3개월치 재산 증빙과 부채 내역을 한 치의 오차 없이 투명하게 제출해야만 했다. 완벽한 남편이자 흠결 없는 가장, 능력 있는 건축가로 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쳐놓았던 거대한 거짓말의 장막이, 얄궂게도 국가의 법 앞에서 발가벗겨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쏟아지는 수돗물 소리 사이로 정민의 거친 숨소리가 묻혔다.
정오를 알리는 라디오 시보가 도시 곳곳에 울려 퍼진 순간이었다.
위잉~. 위잉~. 위잉~.
전국에 흩어진 네 쌍의 부부, 여덟 사람의 주머니와 핸드백, 책상 위 스마트폰이 일제히, 그리고 강렬하게 진동했다. 화면에는 섬뜩할 만큼 선명하고 건조한 텍스트가 떠올랐다.
각자의 폰에 문자가 왔다.
[국가 혼인기한 만료 예고 통지]
귀하의 혼인기한이 6개월(180일) 후 만료됩니다.
갱신을 원하실 경우 만료 6개월 이내에 부부가 동반하여 관할 등록기관에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미신청 시 법적 혼인 관계는 해당일 자정부로 자동 종료되며, 관련 재산권 분할은 별도 첨부된 국가 가이드라인을 따르게 됩니다.
“드디어 왔네. 시간 참 빠르다.”
강남의 최고급 와인바. 평일 낮부터 탁 트인 창가 자리에 마주 앉아 있던 전문직 부부 지훈과 윤정은 각자의 스마트폰 화면을 확인하자마자 약속이나 한 듯 가벼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대형 로펌의 파트너 변호사인 윤정은 우아한 손짓으로 웨이터를 불러 최고급 샴페인 한 병을 주문했다.
“30년 동안 쇼윈도 노릇 하느라 고생 많았어, 당신. 양가 부모님 체면 챙기랴, 각자 사회적 지위 지키랴. 남들 눈에 완벽한 부부 연기하는 것도 이제 질릴 때가 됐지. 6개월 뒤엔 깔끔하게 각자 갈 길 가자고.”
대학 병원 과장인 지훈 역시 넥타이를 살짝 느슨하게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남은 기간 동안 위자료니 귀책사유니 하는 감정 소모 없이, 깔끔하게 재산 분할 정산합시다. 당신이 번 건 당신 거, 내가 번 건 내 거. 공동명의 부동산은 처분해서 정확히 반분하고. 우리 성인답게, 배운 사람들답게 쿨하게 끝내자고.”
두 사람은 너무나도 가벼운 마음으로 크리스털 샴페인 잔을 부딪쳤다. 챙- 하는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별이 이렇게 합리적이고 달콤할 수 있다니. 그들은 진심으로 이 법안을 발의하고 통과시킨 국회의원에게 감사패라도 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30년간의 결혼 생활은 그들에게 그저 잘 관리된 비즈니스 파트너십,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태석의 으리으리한 저택.
밤늦게 술 냄새를 풍기며 귀가한 태석은 거실 소파에 깊숙이 파묻힌 채 넥타이를 풀어 헤치고 양말을 휙 벗어 던졌다. 하루 종일 먼지 한 톨 없이 집안을 닦아놓은 미란이 조용히 다가와 바닥에 떨어진 양말을 주워 담고 있었다.
“어이, 점심에 국가에서 문자 온 거 봤지? 덜떨어진 법 때문에 이게 무슨 수고야. 내일 김 비서 시켜서 서류 싹 다 준비해 놓을 테니까, 당신은 오후에 인감도장이나 하나 챙겨서 나와. 내가 구청장한테 말해서 VIP실로 오라고 해놨어. 줄 서서 기다릴 필요도 없게.”
태석은 거만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평생 뼈 빠지게 돈 벌어다 사모님 소리 듣고 호강시켜 줬으면 당연히 평생 모시고 살아야지, 안 그래? 당신은 나 같은 남편 만난 걸 조상님한테 감사해야 해.”
순간, 바닥의 양말을 줍던 미란의 손이 멈췄다. 거실의 적막이 유난히 무겁고 차갑게 가라앉았다. 미란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 번도 태석을 향해 꼿꼿이 세워본 적 없던 허리를 펴고 태석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녀는 늘 입고 있던 단정한 앞치마 주머니에서 자신의 낡고 두꺼운 다이어리 하나를 조용히 꺼내, 차가운 대리석 테이블 위에 '탁' 소리가 나게 올려놓았다.
“어... 여보, 이게 지금 무슨...”
짜증을 내려던 태석은 테이블 위에 놓인 물건을 보고 말을 멈췄다. 다이어리 사이사이로 태석이 지난 30년간 저질러온 수많은 외도의 흔적을 담은 흥신소 사진들, 다른 여자들과 드나들던 호텔의 결제 내역서, 그리고 미란이 십수 년간 정신과에서 남편 몰래 처방받아 온 지독한 수면제와 우울증 약봉지들이 무덤의 뼈처럼 삐져나와 있었다.
당황한 태석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요동쳤다. 늘 순종적이던 아내의 눈빛이 아니었다. 미란은 30년 만에 처음으로 태석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서늘하다 못해 메말라 바스라질 것 같았다. 단 한 치의 떨림도 없는, 빙점 아래의 목소리였다.
“아니. 내 30년 계약은, 오늘로 끝이야.”
“뭐... 뭐라고?”
“인감도장 챙겨서 갈 일 없어. 남은 6개월, 당신이 내게 진 빚이 얼마인지 정확히 계산해서 청구할 테니까 준비하고 있어.”
태석의 얼굴이 경악과 충격으로 일그러지는 순간, 미란은 단 한 번의 미련도 없이 휙 돌아서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쾅'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거실의 무거운 공기를 날카롭게 갈랐다. 태석은 멍한 표정으로 닫힌 문과 테이블 위의 다이어리를 번갈아 보았다.
벽에 걸린 값비싼 앤틱 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그들의 혼인이 영원히 종료되기까지 남은 180일을 무심하고 잔인하게 재촉하고 있었다.
<다음 웹소설 2부는 11월 19일....>
출처 : 경주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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