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든지 갓 태어난 내 아이를 보면 기쁨과 경이로움 그리고 신성한 감정을 느낍니다.
인간의 길지 않은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임에 분명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는 두 돌이 지나기 전에 자의식과 언어능력이 생기면서 나와 남을 구분하고 욕망과 이기심이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성장하면서 다른 아이에게 이기겠다는 욕망과 시기심이 생기고 자신의 가정환경에 대한 체념과 부모에 대한 원망이 자리잡습니다.
성인이 되면 돈이나 지위 그리고 권력에 대한 욕망이 대부분의 인간의 목표이자 생의 의미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애착도 결국은 고통의 원인이 됩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mortal existence)이므로 영원히 지속되지 않은 사랑과 이별에 두려움과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이 같은 인간의 고통이 원죄에서 출발한다고 보았고 그 구원의 논리를 펠릭스 쿨파(Felix culpa)로 설명합니다.
4세기경 신학자인 성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원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오, 복된 죄여, 이토록 위대한 구원자를 얻게 하였도다 (O felix culpa quae talem ac tantum meruit habere redemptorem"
“아담의 타락과 원죄가 없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도 없었다”.
“예수의 대속에 의해 인간은 타락 이전보다 타락 이후에 더 높은 존재로 회복되었다.
"대속은 창조를 능가한다"(Redemption surpasses Creation)”
13세기의 스콜라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하느님은 선하시기에, 악이 존재하도록 허용하실 때 반드시 그 악으로부터 선을 이끌어낸다"
이것이 펠릭스 쿨파(Felix culpa)로서 "죄, 실수, 고통이 역설적으로 더 큰 선과 구원을 가능하게 한다" 는 사상입니다.
즉, 악과 고통은 신의 계획 밖의 사고가 아니라, 신의 섭리로서 더 큰 선을 위한 허용된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존 밀턴은 실락원에서 이것을 다음과 같이 극적으로 표현합니다.
대천사 미카엘이 에덴에서 추방되는 아담에게 말합니다.
"너는 낙원을 잃었지만, 내면에 더 위대한 낙원을 얻게 될 것이다"
하지만 유일신교인 기독교의 설명은 인간보다는 신을 변호하는 느낌이 듭니다.
제가 신이라면 이 같은 인간의 변호에 대해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겠습니다.
인간이 언제까지 신의 대변자가 되어야 할까요?
아니면 인간이 가련한 운명의 자신을 애써 위로하는 걸까요?
“그렇다면 신은 왜 처음부터 완전한 세계를 만들지 않았는가, 고통받는 자에게 그 고통이 복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고 당연히 묻고 싶어집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이반 카라마조프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합니다.
"단 한 명의 무고한 어린아이의 눈물이 있다면, 그 어떤 '더 큰 조화' 도 나는 받아들일 수 없다"
카뮈는 "세상은 부조리하다. 그러나 그 부조리를 직시하고 반항하는 것이 인간의 존엄이다" 라고 하며
펠릭스 쿨파의 위안을 "철학적 자살" 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고통에 의미를 부여해 회피하는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신을 변호하지 않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붓다가 가장 먼저 한 말이 사성제(四聖諦) 입니다.
"이것이 고통이다. 이것이 고통의 원인이다. 이것이 고통의 소멸이다. 이것이 소멸로 가는 길이다."
불교는 고통의 존재를 신의 뜻이나 운명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철저히 인과(因果)의 관점에서 분석합니다.
다음은 고통의 단계입니다.
1단계 — 고통이란 무엇인가 (苦, Dukkha)
불교의 고통(두카, Dukkha)은 단순한 아픔이 아닙니다. 세 단계가 있습니다.
| 고고(苦苦) |
직접적 고통 |
병, 죽음, 이별, 상처 |
| 괴고(壞苦) |
변화로 인한 고통 |
좋은 것도 반드시 사라진다 |
| 행고(行苦) |
존재 자체의 불안정성 |
모든 것은 덧없다 |
가장 깊은 고통은 행고 입니다.
특별히 나쁜 일이 없어도, 존재 자체가 근본적으로 불안정하다는 것입니다.
2단계 — 왜 고통이 생기는가 (集, Samudaya)
1) 고통의 원인은 갈애(渴愛) — 목마른 욕망
갈애는 세 가지입니다.
- 감각적 욕망 — 쾌락을 끝없이 원함
- 존재에 대한 욕망 — 영원히 살고 싶음
- 소멸에 대한 욕망 — 반대로 모든 것을 없애고 싶음
그런데 왜 갈애가 생기는가? 거기에는 무명(無明, Avidya)이 있습니다.
2) 무명(無明)
무명은 단순한 "무지"가 아닙니다. 존재의 본질을 잘못 보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세 가지 착각입니다.
즉, "나"라는 것이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 그 "나"를 위해 욕망하고 → 욕망이 충족되지 않거나 사라지면 → 고통이 생깁니다.
3단계 — 연기(緣起) — 고통의 발생 메커니즘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 이것이 사라지므로 저것이 사라진다."
붓다에 의하면 고통은 12가지 고리(十二緣起) 로 발생합니다
즉 고통은 신이 준 것도, 운명도 아니라 조건들의 연쇄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건이 제거되면 고통도 제거됩니다.
4단계 — 왜 이 세계는 고통스러운가
삼법인(三法印) — 세계의 세 가지 본질
불교는 이 세계가 고통스러운 이유를 세 가지 본질로 설명합니다.
① 무상(無常, Anicca)
모든 것은 변한다. 사람도, 감정도, 관계도, 몸도. 우리는 영원하기를 바라지만 세계는 본질적으로 무상합니다.
여기서 고통이 시작됩니다.
② 고(苦, Dukkha)
무상하기 때문에, 집착하는 모든 것은 결국 고통을 낳습니다. 이것이 세계의 본질입니다.
즉 이 세계가 유한하다는 사실을 자각하면 할수록 집착은 깊어지고 고통은 가중됩니다.
③ 무아(無我, Anatta)
고통받는 "나"라는 실체가 사실 없습니다.
"나"는 몸, 감각, 지각, 의지, 의식의 다섯 가지 무더기(五蘊) 가 임시로 모인 것입니다.
고통받는 "나"가 실체가 없다면 — 고통도 실체가 없습니다.
불교는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고통은 세계가 만든 것이 아니다. 무명(無明)이 만든 것이다.
존재의 본질을 잘못 보기 때문에, 없는 "나"를 위해 집착하기 때문에 고통이 생긴다. 그리고 그 무명을 걷어내면 고통은 사라진다.
불교는 고통의 외부적 이유를 찾지 않습니다. 고통의 뿌리는 철저히 내 안에 있고, 따라서 해결도 내 안에 있다고 봅니다.
고통을 없애려는 욕망도 갈애입니다. 열반을 얻으려는 집착도 집착입니다.
붓다는 "뗏목의 비유"로 이것을 경고했습니다.
"강을 건너기 위해 뗏목이 필요하다. 그러나 강을 건넌 후에는 뗏목을 버려야 한다.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그 집착마저 내려놓을 때 — 비로소 자유가 온다고 가르칩니다.
마지막으로 임종이 다가오자 붓다가 제자에게 남긴 말씀을 다시 한번 소개합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너무나 인간적이군요, 진정한 위안입니다.
신의 위안보다는 인간의 위안이 비할수 없이 따뜻합니다.
우리는 같은 운명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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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釋迦牟尼)의 마지막 유훈(遺訓)
-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아난다여, 이제 나는 늙어서 노후하고 긴 세월을 보냈고 노쇠하여 내 나이가 여든이 되었다.
마치 낡은 수레가 가죽 끈에 묶여서 겨우 움직이는 것처럼 나의 몸도 가죽 끈에 묶여서 겨우 살아간다고 여겨진다.
아난다여, 그대는 한쌍의 살라 나무 사이에 북쪽으로 머리를 둔 침상을 만들어라.
피곤하구나, 누워야겠다.”
그러자 아난다는 방으로 들어가 문틀에 기대어 울며 말했다.
“아! 나는 아직 배울 것이 많은데 나를 그토록 연민해 주시는 스승께서는 이제 돌아가시겠구나.”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그만하여라, 아난다여, 슬퍼하지 말라, 탄식하지 말라.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모든 것과는 헤어지기 마련이고 없어지기 마련이고 달라지기 마련이라고 그처럼 말하지 않았던가?
아난다여, 태어났고 존재했고 형성된 것은 모두 부서지기 마련인 법인거늘 그런 것을 두고 ‘ 절대로 부서지지 마라 ’ 고 한다면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난다여, 그런데 아마 그대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스승의 가르침은 이제 끝나버렸다. 이제 스승은 계시지 않는다."
“아난다여, 그러나 그렇게 봐서는 안된다.
내가 가고 난 후에는 내가 그대들에게 가르치고 천명한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아난다여, 그대들은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의지하여 머물고 남을 의지하여 머물지 말라,
가르침을 섬으로 삼고 가르침을 의지하여 머물고 다른 것을 의지하여 머물지 말라.
내가 설명한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괴로움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원인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과정이다.
참으로 이제 그대들에게 당부하노니 형성된 것들은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
게으르지 말고 해야 할 바를 모두 성취하라.
이것이 여래의 마지막 유훈이다.”
* 출처: A Blog for StarFairyBaby ( https://blog.naver.com/manumoon/224285270539 )
무아는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영역이구요.
불교 공부하다보면 이게 한국 불교는 힌두교인가 싶을때도 있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