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레놀 사용기입니다.
21. 도시로의 입장
'청다움 청소년 자유공간'
1월 30일 거처는
천안시 성환읍 GS25 건물 3층 청소년쉼터였다.
청소년에게만 허락된 자유의 공간에서
청소년보호법 상 19세 이하로 규정지은
청소년의 정의에 한참 이탈한 나는
부자연스럽게 복도에 짐을 풀었다.
말만 쉼터이지 화장실이 잠겨있어,
생리적 현상을 해결하려면 밖으로 나가야 했다.
밤 아홉 시.
대리석 바닥에 누웠다.
꼬박 하루의 무게에서 벗어난 발바닥이
몹시 욱신거렸다.
체중과 배낭을 더한 1,000N의 중력의 굴레인지,
단순히 타이레놀 약발이 다했는지 알 수 없지만.
다음 날 새벽 인도 없는 천안대로를 걸으려면
4시에는 일어나야 했다.
나는 일반의약품 종이 상자에
단 두 알 남은 진통제를 삼켰다.
일곱 시간의 평안을 위해.
1월 31일 새벽 4시 20분,
엊저녁 다이소 천안성환점에서 산 경광봉에
전원을 켰다.
일정 간격으로 발광하는 경광봉을 잡고
천안대로에서 북쪽으로 올라갔다.
예상대로 차는 많지 않았지만 서둘러야 했다.
연휴가 지난 첫 평일이라
출근 차들이 곧 몰릴 것 같았다.
안궁삼거리까지 6.3km를,
경광봉을 앞뒤로 흔들며 쉼 없이 걸었다.
새벽을 짖는 창고지기 개들만이
나를 알은체 했을 뿐
새벽의 기습은 대성공이었다.
6시, 안궁5리 버스정류장에서
1번 국도는 잠깐 헤어지기로 했다.
더 빠른 지름길을 찾아서였다.
하지만 천안 변두리는 공주보다
더 제설이 되지 않았다.
인도는 눈이 그대로라
경광봉에 의지해 차도로 걸어야 했다.
안성천 너머 평택도
눈에는 대책 없는 건 마찬가지.
펭귄 걸음으로 어기적어기적 걸을 수밖에.
평택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한 시각은 7시였다.
새벽같이 11km를 걸어온 데다
등 받침 있는 대기실 의자는
편의점 의자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편안했다.
잠깐 앉았는데도 눈이 감겼다.
1번 승차 홈은 서울남부터미널까지 가는
직통버스가 있었다.
5,800원에 지금 발권하면
곧장 서울지하철 3호선
남부터미널역까지 갈 수 있었다.
동서울은 6,800원, 잠실은 6,300원.
끼니 보다 싼 버스삯에
비효율을 고집하는 내가 미련스러웠지만
눈을 냅다 감고 밖으로 나왔다.
CU평택역광장점으로 들어갔다.
5,800원인 버스요금이 떠올라
그보다 비싼 것은 고를 수 없었다.
장바구니에 담은 것은
그릴드어니언비프버거와 미역국.
동서양의 조합이었다.
햄버거 소고기 패티는 단백질을,
물 대신 선택한 미역국은
비타민D, 칼슘과 마그네슘을 보충해 주리라.
편의점 바닥은 눈 녹은 물이 거뭇거뭇 더러웠다.
전자레인지는 끓어 넘친 국물이
회전판에 붉게 눌어붙었고,
식탁은 하나같이 흘린 음식으로 찐득했다.
모든 것이 더럽지만
점원은 휴대전화만 만지작거리기만 할 뿐,
편의점 청결상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불평하는 나를 쿰쿰한 냄새가 난다고
되려 혐오하는 같았다.
하기야 맞는 말,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상점을 나무라는 격이었다.
잠자코 계산된 햄버거와 컵 미역국을 받아들었다.
햄버거 봉지를 조금 째고,
전자레인지 회전판 국물자국 없는 공간을
기여이 찾아내 그 위에 얹었다.
1분 30초의 차임이 울리자마자 봉지를 뺀 나는
더러운 식탁 중 가장 깨끗한 식탁에 앉았다.
앞선 손님의 라면 국물 자국을 냅킨으로 닦고,
뜨거운 물을 부은 미역국 컵을 올려놓았다.
전자레인지 돌림판 위 병균은
마이크로웨이브에 다 타죽었겠지?
현대기술을 신봉하기로 했다.
따뜻한 국물과 함께 졸음이 밀려 들어왔다.
11시 30분.
최미삼순대국에 들어갔다.
공주시청 나그네식당 이후
이틀 만에 온 식당이었다.
새벽부터 걸어 그만큼 여유가 있었다.
한눈에 봐도 체인점인 식당은 한결 체계적이었다.
손님 맞기를 시작한 종업원은
내 일행이 없음을 파악하고
구석 자리로 안내했다.
"어디 산에 다녀오셔요?"
그녀는 배낭을 진 내게 궁금하지 않지만,
의례적인 질문을 뱉었다.
그리고 내 대답을 듣는 대신
입구로 들어오는 다른 손님들의 숫자를 가늠했다.
나도 형식적인 대답으로 응수했다.
"아침에 잠깐요."
배추김치, 깍두기, 부추, 고추의
표준화된 밑반찬과 흰쌀밥이 먼저 나왔고,
몇 분 후 뜨거운 뚝배기가
3단 카트에 실려 당도했다.
종업원들은 출입문 앞에 서서
육식동물의 흔적 찾기에 충실한 미어캣인 양
고개를 쭈뼛대며 손님들의 입장과 호출 버튼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드디어 도시에 왔다.
눈 감으면 콧잔등을 베어가는 도시.
나른하게 몰려오는 한 낮의 졸음이
퍼뜩 쓸려 나갔다.
타이레놀이 없으면 걸을 수 없었다.
여섯 시간 지속되는 약발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음 약을 집어삼켜야 했다.
다행인지 편의점마다 약은 꼬박꼬박 비치되어
약 떨어질 걱정은 없었다.
어쩌면 진통제가 없으면 지낼 수 없는
우리의 일상 덕인지도 몰랐다.
특히 걷다가 멈추면 더욱 아팠다.
건널목 적색 신호등 앞에 서면
똥 마려운데 게으른 주인을 둔 탓에
산책도 못 나가는 강아지인 양 빨빨거려야 했다.
차라리 계속 걷는 게 나았다.
시간도 아끼고 고통도 모르니
일거양득인 셈이었다.
그 이유로 나는 차량 통행이 없는 횡단보도는
무단횡단 하기로 했다.
한참을 횡단보도의 무법자 행세를 하는데,
오른쪽 차로에서 경적이 크고 길게 울렸다.
검정 그랜저가 좌회전을 하며
경계석 위에서 어물쩡 눈치보는 내게
클랙슨을 누른 것이다.
나는 그랜저와 같은방향이라
차 회전반경에도 10m 넘게 빗겨나 있었고,
뒤를 돌아 차가 오는지도 알고 있었는데,
3초가 넘는 신경질적인 경적이 괘씸했다.
"야이, 시발 새끼야!"
약발이 떨어져 악만 남은 약쟁이는
좌회전한 그랜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등산 스틱을 휘젓는 모습은 마치
연가시에 감염된 수컷 사마귀의 전투태세 같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랜저는 우리나라 첫 자동차인 시발자동차의
열여덟 번째 새끼쯤 될 테니,
나의 외침은 '시발 자동차의 열여덟째 후손'을
축약한 셈이었다.
하지만 최신 그랜저는 풍절음은 물론
비속어까지 잡는 최신식 이중접합
차음유리기술을 탑재하여,
내 고함은 들리지 않는 듯 멀어졌다.
그게 아니라면 노숙자에게 잡혔다간
피곤한 일에 휘말리지 않을까 하는
현명한 판단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무릇 잃을 게 없는 사람이 제일 무서운 법.
약쟁이는 시발자동차의 후예를 잡지 못해
분했는지, 발바닥 통증도 잊은 채
동탄으로 뛰듯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