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 댓글로 사용기 게시판에는 여행글은 적으면
안 된다는 분이 있어서 글 말미에 구입링크를 적었습니다.
제가 직접 구입한 것으로 제품협찬은 아니고,
링크로 구매해도 제가 받는 혜택은 전혀 없습니다.
20. 지우기 힘든 흔적
쌍령로에서 시간을 지체하여
식당에서 점심 먹는 건 포기해야 했다.
남관리 세븐일레븐.
고개를 넘기 직전 빠진 힘을 보충할 겸 들어갔다.
흔한 삼각김밥은 지겨워,
허브솔트맛을 더했다는 광고에 혹해
춘천식 직화 닭갈비를 하나 집어 들었다.
전자레인지에 팽창한 닭봉지를 뜯다가
닭기름이 외투 앞섬에 튀었다.
치약 짜낸 칫솔로 문질러 보았지만
기름 자국은 여전히 돋보였다.
천안 시내 외곽으로 들어가서는
새마을호 경부선을 따라 천안역까지 걸었다.
천안고가교 밑에는
할아버지들이 장기를 두고 있었다.
장기판 주위를 둘러싼 같은 연배의 관객들은
한 수 한 수 환호와 탄식을 뱉었다.
흡사 롤드컵 천안 지역 예선을 보는 듯한 열기.
지금의 사십 대가 스타크래프트였고,
이제 리그오브레전드로 바뀌었을 뿐
할아버지 세대의 장기는 어엿한 스포츠였다.
스포츠에 진심인 남자들.
오죽하면 중고등학생 머리마저
스포츠로 깎았겠는가?
천안역에 가까워지자,
거리에 줄지은 공업사 건물은
간판도 떼지고 바래진 채 낡아 있었고,
1층의 내려진 셔터마다
락카로 두세 번 덧칠한 커다란 X 표시가 있었다.
그 표식은 거절된 도시의
초라한 과거 같아 처량했다.
2003년 2월 초, 군대에 있을 때였다.
상병 말 호봉이었던 분대장은
외박 때 공수한 탁상 달력에
제일 먼저 8월 7일, 제대 일을 찾아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1월 서른하나의 숫자에
굳이 공들여 엑스 표를 쳤다.
군시절이 죄다 쓸모없다는 듯
그의 손놀림은 억셌지만, 표정은 분명 밝았다.
하기야 4.2인치 박격포 사격 기술이
21세기 대한민국에 어떤 도움이 되겠는가?
훈련 때마다 SPF30 자외선 차단제를
새하얗도록 칠했던 그는
입대 10개월 만에 여자 친구에게 차였다.
왕게임을 하다 같은 과 가장 예쁜 동기를
사귀었다고 경계근무 내내 호들갑을 떨었던 그는,
똑같은 왕게임으로 그녀를
얼굴도 모르는 선배에게
고스란히 넘겨주어야 했다.
속수무책이었던 대관식.
공중전화카드가 닳도록 통화했던 휴게시간은
침묵으로 지워졌다.
그가 얻은 것이라곤
군화 속에서 문드러진 무좀균뿐.
군대가 그의 찬란한 20대를 썩힌 건 틀림없었다.
그는 제대 날,
사회에 나가면 연락하라는 의례적인 인사도 없이
손을 흔들며 유유히 위병소를 빠져나갔다.
네 시 반, 두정역을 지나니 천안 시내는 사라졌다.
오늘 목표로 한 성환역까지 가려면
시간이 부족했다.
타이레놀 두 알을 씹었다.
1번 국도, 천안대로의 제설 덜된 인도,
풍경이라고는 차들만 휑한 너른 길을
닥치고 걸었다.
다섯 시 반 직산역.
하늘에 스누크 헬기가 떠 있었다.
그것은 작금의 흉흉한 시절을 감시하는 듯
프로펠러를 회전하며 하늘을 유영했다.
그러다 내 위에 한참을 떠 있었다.
마치 나를 경계하는 듯.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난 의심살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는데,
이상했다.
아니, 이상할 만했다.
군부대도 없는 천안, 등산할 산도 없는 평야에
완전 군장한 거수자라니.
헬기에 탄 승무원은 망원경으로
나의 외투에 적힌 글자를 보았음이 틀림없었다.
'NORTH'라고 쓰인 옷을 입은 나를
확신에 차서 지휘통제실에 보고했다가,
'FACE'라는 문자를 나중에 알아차리고는
슬그머니 사라졌으리라.
7시 성환읍에 도착했지만,
설 연휴에 문 연 식당은 마땅치 않았다.
다시 GS25.
김혜자 도시락과 육개장 컵라면을
스캐너로 찍는 사장에게 주방세제를 빌렸다.
노스페이스 처음 입은 건데
아내가 기름 묻은 걸 알면
바가지를 긁을 게 뻔하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닭기름에 세제를 적셔 비볐더니,
치약으로는 아무리 해도 없어지지 않던
얼룩이 말끔해졌다.
지우고 싶은 과거도 사라지게 하는
세제가 있을까?
없다면 깡그리 밀고 새로 만드는 수밖에.
더벅머리를 한 나는 라면이 익는 3분 동안,
여행이 끝나는 휴가 마지막 날로
미용실을 예약했다.
비렁뱅이와 진배없는 지금을 싹둑 잘라내려고.
노스페이스 남성 에코 고어텍스 마운틴 자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