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생각만 해도 슬픈 음식
저녁, 정안은 문 연 식당이 없었다.
GS25 앞에서 컵라면에 김혜자 도시락을 먹을까
고민하는 사이,
순찰차에서 내린 경찰 둘이 '한강라면',
무인라면 가게로 들어갔다.
나는 컵라면보다는 끓인 라면이 낫겠다 싶어
그들을 뒤쫓았다.
작동되는 기계가 두 대뿐.
젊은 순경은 앞서 기계를 조작하고,
나이든 경감은 곁눈질로 더듬더듬 버튼을 눌렀다.
나는 오징어짬뽕을 쥔 채 순서를 기다렸다.
'얼큰한 맛 너구리'를 능수능란하게 끓인 순경이
뒤편 식탁에 앉자,
경감은 내게 조금 전에 습득한 기계 사용법을
보란 듯 풀어냈다.
그리고 커다란 배낭을 궁금해했다.
“어디 다녀와요?”
질문에 얼핏 경계심도 비쳤다.
"광주에서 서울까지 걷고 있어요."
그는 내 나이를 묻고는, 띠동갑이라고 했다.
삼 분 후 라면이 익자 그는 순경이 앉은 탁자로,
나는 창문 앞 일인용 바 테이블로 흩어졌다.
벽 콘센트에 꽂아놓은 휴대전화가
모두 충전될 때까지 천천히 먹느라
짬뽕 면의 단면적이 두 배로 퍼질 무렵,
식사를 마친 그는 아메리카노를 뽑아선
내 그릇 옆에 놓았다.
"오늘 밤 따뜻하게 자요. 내 선물이에요."
9시, 파출소 맞은편 신식 건물로 숨어들었다.
옥상까지 오르는 내내
계단 천장에 붙은 센서 등이
나를 감시하듯 켜졌다.
꼭대기 층계에 침낭을 펴고 잠 든 노숙인은
고작 두 시간 만에 깼다.
오줌이 마려웠다.
열두 시간 도보의 피로는
카페인의 각성 효과 따윈 전혀 듣지 않았지만,
이뇨 작용은 강력했다.
그때 아래층에서
계단을 오르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불이 켜지면 도둑잠을 들킬까 봐
꼼짝할 수 없었다.
방광 센서는 방류 시점이 임박했다는
홍수경보를 긴박하게 타전했다.
인기척이 뜸한 틈을 타 일어났다.
어김없이 불이 켜졌다.
나는 밖으로 나가는 걸 포기하고,
500ml 페트병에 절반 차 있는 물을 들이켰다.
마지막 화살을 쥔 양궁 선수라도 된 듯
숨을 참고 빈 병 속으로 시위를 당겼다.
섭씨 36.5도의 노란 온기가 바닥부터 채워졌다.
병 목구멍까지 찰랑이는 따뜻함.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마개를 돌려 닫았다.
다시 침낭으로 파고든 지 오 분.
걸음 소리가 옥상까지 이어졌다.
"여기서 뭐 해요? 당장 나가요."
주인 남자의 호통은 생급스럽고 위협적이었다.
조명은 회색 내복에 더벅머리 한 나를
오백 럭스 밝기로 비추었다.
적나라한 비루함.
나는 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대신
재빨리 사과했다.
시간을 끌어봤자 경찰을 부를 것 같았다.
밤 1시.
텅 빈 마을 길을 점령한 차령산맥의 바람은
몹시 냉랭했다.
어디서 자나?
편의점도 닫힌 지금,
문을 연 곳은 파출소와 한강라면 뿐.
우두커니 길 건너 정안파출소를 들여다보았다.
경감은 점퍼를 벗고,
책상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소용돌이치는 눈발에
나뭇가지마저 몸서리치는 바깥과 달리
파출소 안은 거짓말처럼 안온했다.
'커피만 아니었어도 푹 잤을 텐데'.
얄궂은 원망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편의점을 등지고 정안종합식품 평상에 앉았다.
지붕 위 눈 뭉치가 바람에 으깨어져
얼굴을 때렸다.
'밤 판매'라 쓰인,
처마에 붙들어 맨 A3만 한 안내판에선
풍경소리가 났다.
다 팔리고 내 코앞에서 매진된 따뜻한 밤이라니.
따뜻하게 자라며 건넨 아메리카노는
차라리 주거침입죄로
유치장에 들어오라는 경감의 배려였을까?
용기는 바닥나
낙담의 눈금 발치에서 얼씬거리다가도
어느새 방광 속 오줌처럼 차올랐다.
센서 등은커녕 백열전구조차 없을 것 같은
광정전파사 건물 어둑한 계단을 올랐다.
2층 행운다방 앞,
한 평 남짓 거무튀튀한 바닥에 배낭을 끌렀다.
쥐와 바퀴벌레가 득시글거려도
이상하지 않을 시공간.
금방이라도 40년 전으로 빨려갈 것 같은
시간의 결계에서
그날 밤 두 번째 행운을 시험하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