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글을 쓸 때마다 듣는 음악
양말은 축축해지고, 발은 차가워졌다.
오후 3시,
논산 써브웨이의 늦은 점심 이후 주구장창,
젖은 길바닥에 앉을 수 없어
의자 있는 정류장까지 두 시간을 꼬박 걸었다.
하루 거리가 30km를 넘자 발바닥은 아우성쳤다.
쉬면 다리가 죄다 굳어,
지팡이로 땅을 힘껏 밀쳐야 겨우겨우 움직였다.
눈은 잠잠해지는 듯하다,
해가 져 가로등이 밝자
날파리떼처럼 달려들었다.
목적지 논산 장마루 경로회관.
쉴 때마다 지도 앱으로 남은 거리를 쟀다.
8km, 5km, 2km, 1km.
저녁 7시, 논산 죽림 3구 회관.
건물 안에서 나이 든 목소리가 서넛 들렸다.
외벽에 붙은 ‘한파 쉼터’라는 안내표지에
용기 내어 문을 두드렸다.
오늘처럼 추운 날,
쉴 곳이 필요한 사람은 누가 봐도 나였으니까.
“계세요?”
투블럭 커트 한 퉁퉁한 중년 남자가
가뜩이나 튀어나온 눈을 더욱 부라리며 나타났다.
그는 잠만 자겠다는 노숙인의 요청에
안 된다고 답했다.
노숙인은 도보여행의 취지와
눈에 젖은 발가락을 들먹이며 재차 부탁했지만,
투블럭 사내는 자신이 회관 관리자가 아니라
결정할 수 없다고 난처해 했다.
배낭 풀 힘도 없어
문밖 간이의자에 그대로 앉았다.
등과 벽 사이에 배낭이 두꺼워
엉덩이만 겨우 의자에 걸쳤다.
뿌연 입김 말미에 마을 정자가 보였다.
바깥을 창으로 마감해 찬 바람을 막고 있었고,
마루에 뽀얀 먼지는 천막을 깔면 문제 없었다.
잘 곳은 정했고,
이제 꾸르륵거리는 뱃속만 달래면 됐다.
장마루로에 나란한 짜장마루, 남원추어탕,
현진식당은 모두 불이 꺼졌다.
유일하게 연 장마루치킨.
어제의 멕시칸치킨이 십이지장을 통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중앙아메리카를 기원으로 삼은 프랜차이즈와
대한민국 중부지방에서 자생한 닭 요리는
맛이 완전히 다를 것이라 되뇌었다.
치킨집 미닫이문 안쪽에는
낯빛이 검고 콧수염이 매캐한 남자가
소파 등에 팔을 괴고,
설 특집 트로트 경연을 보고 있었다.
대설경보와 강풍주의보에도
꿋꿋이 문을 닫지 않은 그는,
위나라 철기병을 다리 위에서 홀로 맞선
장비익덕 같았다.
물론 이곳은 장판파가 아닌 장마루이고,
그가 손에 쥔 것은 일 장 팔 척의 장팔사모 대신
달랑 일 척짜리 튀김 집게였지만.
“언제 문 닫아요?”
“여덟 시유.”
벽걸이 시계는 7시 10분.
오십 분은 여유로웠다.
식당은 은색 연통을 매단 연탄난로를 중심으로
테이블이 넷 있었고,
3인용 겨자색 인조가죽 소파가 짝을 이뤘다.
둘러멘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고,
벽에 걸린 메뉴판을 보았다.
“음.... 제일 비싼 거 먹어야지. 파닭 주세요.”
사장님 들으라고 일부러 혼잣말했다.
나를 받아준 게 고마워 고른
25,000원짜리 메뉴였다.
‘삐비비빅, 삐비비빅’
타이머가 울렸다.
닭 조각들이 기름 속으로 투하된 지
정확히 11분 후였다.
사장님은 양념을 버무린 치킨 위로
파채가 수북한 대접을 내왔다.
“오늘 설 대목이라 손님 많죠?”
“더 없어유. 명절에 다들 놀러가니깨유.”
“그래도 치킨집 여기 하나니까
사람들이 많이 사 먹지 않아요?”
“아유. 노인네들 다 죽었슈.
작년부터 열댓 명이나 갔슈.”
지방 소멸의 정점에 출몰한 나는
계속 이야기를 못 잇겠다 싶어
여행 이야기를 꺼냈다.
“광주에서 서울까지 걷고 있어요.
사 일짼데 오늘은 익산에서 사십 킬로 넘게 걸었어요.
발이 다 젖어서요. 난로 좀 쬘게요.”
발을 말리려는 속셈도 있었다.
손님이라고는 나 혼자지만
엄연한 식당 예절은 아닐 테니.
신발을 벗고 양말 째 난로에 댔다.
그는 물끄러미 내 행색을 보았다.
“잠은 어디서 자유?”
“밖에, 노인회관 앞에 정자가 있더라구요.
거기서 자려구요.”
“추울낀데,
내가 계속 있으믄 여서 쉬라고 할 틴디....”
그는 말꼬리를 흐렸다.
“괜찮아요. 침낭 깔고 자면 돼요.”
30분 전만 해도 잠자리를 구걸하던 거지는
그새 닭 날개 튀김을 물어뜯더니,
지가 티라노사우루스라도 된 듯 의기양양했다.
8시, 문닫을 시간.
사장님은 남은 치킨 세 덩이를 비닐에 담아 주었다.
헤어짐의 징표로 양념통닭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는 난로 뚜껑을 열어,
다 타서 열기만 남은 분홍빛 연탄을 집어내고,
그 빈자리에 새까만 새 연탄을 두었다.
재가 뭍어 희끗해진 집게를 내려 놓으며 말했다.
“여기서 자유.”
“예?”
“불 켜져 있음 사람이 막 들어오니께,
불은 끄구. 테레비는 켜놔두 될뀨.”
그는 화장실 위치를 일러주고,
주방 온수를 켜는 법,
출입문 잠그는 요령까지 시범을 보이고는,
작별 인사할 짬도 없이 홀연히 떠났다.
설레었다.
따뜻한 물로 머리 감을 생각에.
그가 알려준 대로 주방 벽,
온수기 레버를 90도 돌리니
뜨거운 물이 왈칵 쏟아졌다.
싱크대에 고개를 박고,
찬물을 섞어 적절히 미지근해진 물을
바가지째 들이부었다.
여행용 샴푸를 손에 덜어 젖은 머리카락에 비볐다.
‘이상하다. 왜 거품이 안 나지?’
물이 들어갈까 찡그린 눈으로
튜브에 적힌 영어를 읽었다.
‘컨디셔너’.
분명히 다이소에서 샴푸를 골랐는데,
정작 집어 온 건 보습제였다.
샴푸, 아니 컨디셔너 몸통의
이상해씨(포켓몬 캐릭터)는
뭐가 즐거운지 송곳니를 드러낸 채 웃었다.
주방 빨랫비누로 감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고,
배낭 속 반짇고리를 꺼냈다.
우측 새끼발가락 안쪽,
불쑥 돋은 물집에 실을 꿴 바늘을 단숨에 찔렀다.
홑겹 표피가 겨우 가둔 투명한 진물이
나일론 실에 스며들었다.
입김을 불어 넣은 공기베개를 베고,
침낭 지퍼를 죄다 열어
네모나게 만든 차렵이불로 찌든 몸을 덮었다.
그런데 연탄난로가 머리맡이다.
일산화탄소에 중독되면 어쩌지?
동치미 국물도 없는걸.
냉장고 옆 잔뜩 쌓인 치킨 무를 뜯어
식초 물이라도 마셔야 하나?
지그시 노려보던 눈을 거두고,
베개를 소파 반대쪽으로 던졌다.
난로 멀리 머리를 두면,
그래도 조금 더 천천히 죽지 않을까?
사람을 피해, 사흘 밤을 길고양이처럼 숨어 잤다.
버스 끊긴 정류장, 불 꺼진 상가 복도,
손님 없는 노래방 옥상 계단참.
불완전 연소한 일산화탄소처럼
무거운 외톨이 산소 화합물은 바닥에 웅크렸다.
이날도 으레 그런 날 일 줄 알았다.
하지만 장마루치킨 사장님이 가게를 내주었다.
정체 모를 여행자에게 통째로.
내가 미리엘 주교의 은촛대를 훔친
장 발장이었다면,
냉온수기 위 400개 들이
대용량 맥심 화이트골드 커피 한 상자를
옆구리에 끼고 달아났을지도 모른다.
대신 나는 편지를 썼다.
리모컨으로 텔레비전 트로트 가수의
비브라토를 깡그리 줄였다.
달그락달그락.
장마루를 휘감는 바람이 유리문을 뒤흔들었다.
손바닥만 한 포스트잇에
모나미 153을 꾹 눌렀다.
‘서울까지 걷기, 꼭 성공하겠습니다.’
음력 2024년의 마지막 날.
언제나 홀로였던 여행자의 밤,
이날도 분명 혼자였지만 결단코 외롭지 않았다.
눈을 흠씬 맞아 척척해진 외톨이 연탄은
사그라드는 다른 연탄의 은근한 온기에,
새하얗고도 완전하게 연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