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논산. 후반기
4일 차. 2025년 1월 28일.
‘입주를 환영합니다.’
입주환영 현수막 한쪽 끝을 고정한 각목이
밤샌 강풍에 풀려서 기둥을 계속 쳤다.
불규칙적 타종 소리는
모기 보다 영악하게 방충망을 뚫고,
상가 2층 복도로 들이쳤다.
휴대전화 속 소란스런 대설경보도 영락없었다.
눈은 이틀째 퍼부어댔다.
6시 50분,
찬물로 감은 머리에 모자를 눌러쓰고 출발했다.
눈은 길고, 눈은 짧다.
내리는 눈은 장음, 얼굴에 달린 눈은 단음.
그래서일까?
하늘에서 떨어진 눈은 길게도 내렸다.
덕분에 내 짧은 눈을 질끈 감았다.
도로는 이따금 차가 지나다녀
인도만큼 눈이 두텁지는 않았지만,
새벽의 뜸한 차량 운행 때문에
하얀 눈가루들은 한 층 한 층 포개어갔다.
인도 위 포실한 눈을 밟으면
신발 목 틈새로 차가운 결정들이 들어갈까 봐,
차라리 차로의 납작 눌러붙은
트럭 바퀴자국을 밟는 게 나았다.
눈은 무섭게 떨어지다가 잠깐씩 쉬었다.
나도 왕궁저수지 사은가든에 멈췄다.
문 닫은 붕어찜 식당에
고양이 한 놈이 지키고 앉았다.
양재기에 머리를 박고 생선을 훑던 녀석은
인기척에 나를 빤히 쳐다보기만할 뿐
앞발을 휘두르진 않았다.
내가 물고기를 훔쳐먹을
막돼먹은 놈은 아니라는 거겠지.
10시.
익산시 여산면 사과나무정원 식당을
지날 때였다.
식당 사장은 마당겸 주차장에 넉가래질을 하다,
걷는 나를 불러세웠다.
“잠깐 따뜻한 차라도 마시고 가요.”
그는 사투리를 쓰지 않았다.
서울 구로구 대림동에서 살다가 10년 전,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장모 고향인 여산으로 내려왔다.
우연히 이 식당을 인수했는데,
다행히 근방에 육군부사관학교가 있어
장사는 수월찮게 된다고 했다.
일회용 컵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갈색 믹스커피를 홀짝이는 동안
난로에 바싹 붙은 바지 밑단이 노곤하게 말랐다.
그가 쥐여 준 박카스를 바지춤에 넣었다.
구식의 자양강장 음료는
내가 여행의 무게에 주저앉는 순간,
새콤한 위로가 될 테니.
11시.
눈은 여전했다.
걸을 때마다 주먹만 한 눈덩이가 등산화를 덮고,
그 위에서 조금씩 녹아 양말을 적셨다.
제설차가 왕복 2차로에서 좌측통행하는
나를 제치고 우측 차로로 지나갔다.
몇 분 후 눈이 빽빽하게 들어찬 길은
모세가 홍해를 가르듯
검은 아스팔트 속살을 드러냈다.
염화칼슘의 기적.
오! 할렐루야!
하지만 무신론자가 걷는 좌측 차로는
쌓인 눈이 백설기 같이 네모 반듯했고,
걸음을 디딜 때마다 신발 속으로 눈이 들어왔다.
하나님의 선택적 사랑은
눈길 위에서도 어김없었다.
급기야 나는 소보루빵에 홀려
논산훈련소 법당에서 수계를 받았던
스물한 살의 선택을 후회했다.
어느덧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대.
설연휴에 입소하는 신병은 없었다.
군인백화점도 파란 셔터를 내린 채였다.
육군훈련소 온 김에
M16 한 정 사 가려고 했는데 하는 수 없었다.
참, 입소할 때 사가면
보급관에게 칭찬 받는다는
K2소총, 수류탄, 클레이모어
훈련병 삼종세트는 아직도 팔려나?
눈길을 오래 걸었더니 도깨비에 홀렸는지,
헛생각만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