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멸종과 진화, 그 사이
3시.
고랑 주유소에 앉아 CU 족발 봉지를 뜯었다.
우적우적 집어삼킨 돼지 다리 살이
오늘 점심이었다.
휙, 불어온 바람에 족발 비닐은 덱데굴 굴러
풀숲으로 사라졌다.
이에 낀 고기가 성가셨다.
칫솔은 배낭 안쪽에 있어 꺼내기 귀찮았다.
바닥에 뒹굴던 케이블타이 꼬리를 쥐고
이를 쑤셨다.
전신주 사이 늘어진 전선 위에
떼를 지은 까마귀들,
플라스틱 맨홀 위에 웅크린 고양이가
나를 보는 눈빛이 무척 애틋했다.
"젊지도 않은 것이 왜 고생을 사서 한담? 깍깍!"
"그러게나 말이야옹"
심심한 너희 생활에
이야깃거리라도 됐으니 족하다.
나는 배낭을 둘러메고 길을 서둘렀다.
만경강 초입 삼례교.
온통 회색 구조물 사이 이질적인 초록색 명판에는
‘준공 1992년, 시공사 삼성종합건설’이라 쓰여 있다.
삼성종합건설에서 삼성물산으로 바뀌었을 때,
건설회사 이름이 ‘삼성물산’이 뭐냐며
콧방귀 뀌던 사람들 한 세대가 끝나자
‘건설’ 붙은 사명은 멸종 1등급이 되었다.
멸종과 진화로 요동치는 사이,
직립보행으로 진화한 배낭 진 포유류는
육천육백만 년 전
칙술루브 운석 충돌로 멸종된
공룡들의 넋을 위로하며 만경강을 넘었다.
눈발이 이따금 몰아친 네 시,
삼례읍 공용터미널 근방은
90년대를 훔친 도굴꾼들의 전리품을 진열한 듯
그 시대에 멈춰있었다.
사거리 한복판,
흙벽돌에 시멘트를 바른 2층짜리 기와집은
외벽 페인트가 누렇게 바랬고,
'현떡방앗간'의 돋을새김 간판은
무엇이 '앗'의 'ㅏ'자를 앗아간 채 녹슬어 있었다.
지그재그 파인 골로 기름이 잘 빠져
삼겹살 불판으로 제격이었고,
암 유발은 특등급인 슬레이트 지붕들도
군데군데 보였다.
삼례를 넘어 왕궁면으로 가는 길도 그랬다.
고즈넉한 농업지대 옆
낡아빠진 상점들과 수명 다한 공업시설.
설 연휴 직전,
두툼한 점퍼와 목도리로 살갗을 죄다 가려
눈동자만 짙게 꿈뻑이는
동남아시아 노동자 넷이
공장 철거 공사장 경계에
EGI판넬을 붙이고 있었다.
나는 대뜸 인사했다.
"수고하세요."
"예에."
그들의 대꾸는 빙하기에 적응한
원시 우랄 알타이어족만큼이나 정다웠다.
사방팔방 논밭.
평야의 끝자락에 불현듯 마천루가 솟아있었다.
익산 푸르지오 더퍼스트.
4km 밖에서도 명확한,
‘더퍼스트’라는 명칭에 걸맞은
단하나의 솟음이었다.
한 시간을 꼬박 걸어 도착하니 본격적인 눈 세례.
아파트단지 옆 멕시칸치킨에 들어갔다.
홀쭉해진 배의 위산은
식탁까지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사장님 손이 내 위장보다 큰 게 틀림없었다.
난 치킨을 삼분의 일이나 남기고 일어섰다.
도로의 눈은 삽시간에 불어났다.
치킨집 화장실을 돌아 엘리베이터 4층을 눌렀다.
‘설이니 아무도 없겠지?’
어제처럼 옥상 계단참에 자리 잡으려 했다.
그러나 꼭대기 층은 온갖 외래어가 웅성거렸다.
설에 고향을 가는 것은 고향이 가까운 사람들뿐.
외국인들은 고스란히 숙소에 남았다.
승강기 게시판에는
라오스어인지 인도네시아어인지 모를
글자들이 빽빽했다.
낮만 해도 아무렇지 않던 그들이 돌연 오싹해졌다.
밖으로 나왔다.
별안간 눈이 정수리를 덮었다.
눈은 발목까지 찼다.
꽝꽝.
아파트 상가 문이
거센 바람에 술 취한 노인의 얄팍한 넓적다리인 양
후들거리며 문틀을 쳤다.
곧 280mm짜리 흰 발자국이 상가 출입구까지 이어졌다.
부동산만 덜렁 입점한 상가 2층.
태권도학원으로 제격인
모서리 가장 큰 호실 앞에는
데코타일과 석고 텍스가 수북했다.
한쪽으로 자재를 걷어낸 공간에 스티로폼을 깔았다.
내게 2제곱미터면 차고 넘친다.
3일차가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