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문익점 혹은 테러범
금구면은 김제시, 이서면은 완주시,
조금 더 가 덕진구는 전주시이다.
파죽지세.
행정구역 셋을 연달아 주파해야 했다.
눈은 내리다 말다, 도돌이표 쳤다.
차도는 루팅을 따라 길게 물이 흘렀다.
등산화를 젖지 않게 하려고
물길을 피해 도로 중앙으로 걷다가,
차가 오면 도로 끝으로 도망쳤다.
언뜻 보면 먹이를 주워 먹으러
마을로 내려온 고라니 꼴이었다.
이서면을 통과해 전주시 덕진구로 들어서는 길목.
지도에 호남고속도로 서전주 IC 근처,
지름길이 보였다.
농촌진흥청이라고 음영 진 땅은 무척이나 넓었다.
여기를 질러 가면 오백 미터는 족히 아낄 수 있겠다,
고 좋아했다.
목덜미를 훑고 지나간 차가운 바람마저 청량했다.
입구 경비실에 닿기 전까지.
"안녕하세요.
제가 엊그제부터 광주에서 걸어가고 있는데요.
여기로 좀 들어가도 될까요?"
"안 돼요."
눈도 끔뻑하지 않은 경비원의 답변에 당황했다.
하지만 내가 누구랴.
백 킬로미터 넘게 걸어온 사람 아니더냐.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출발지인 '광주'와
'도보', '노숙', '피로'를 강조하며 읍소했다.
하지만 그도 만만찮았다.
그는 '안 돼요', '저 잘려요'라는 문구로
나의 충청도식 능구렁이 공격을 내쳤다.
한 번만 봐주면 안 되냐? 안 된다.
새벽부터 걸어서 힘들어 죽겠다. 권한이 없다.
여기까지 오백 미터나 걸어왔는데
나가라고 하면 일 킬로를 더 걸으라는 건데,
불쌍하지 않냐? 돌아가시라.
춥다. 묵묵부답.
옥신각신, 아니 애걸복걸 십여 분의 공성전.
해자를 깊게 판 성에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한 채
퇴각해야 했다.
그는 왜 나를 끝끝내 들이지 않았을까?
내가 농촌진흥청에서 애지중지하는 목화씨를
훔쳐 달아날 스파이인 줄 알았을까?
어쩌면 배낭 가득 온갖 세균을 배양한
폭탄으로 영내 모든 종자를 오염시킬
테러리스트로 보았을까?
돌아가는 길,
바람이 나뭇가지를 진저리 치도록 헤집었다.
거절은 바람맞은 나무만큼이나 쓸쓸했다.
전주시 초입.
공사장 출입구 가로수 아래, 경광봉을 주웠다.
손잡이 버튼을 눌렀지만 불은 안 켜진다.
약이 다 됐는지 고장이 났는지는 모르겠다만,
가볍기라도 해야 싶어 건전지를 빼버렸다.
대학교 1학년 추석을 앞둔 날이었다.
한 살 터울 육촌 형이 나를 수원역으로 불렀다.
그는 공업고등학교 3학년 2학기,
실습으로 들어간 공장에서 2년째
밀링머신으로 자동차 부품을 깎고 있었다.
수원역 6번 출구,
두리번거리는 내 앞에 검은색 세피아 투가 섰다.
중고차 매매 상사에서 이백만 원에 데려온
그의 첫 차.
찌그러진 범퍼에는 총알 자국 스티커를 붙였고,
문짝 틈과 유리에는 네온이 덕지덕지,
양 카느낌이 물씬 났다.
안테나는 왜 이리 높은지
이마트 지하 주차장에나 들어갈까, 갸웃했다.
경부고속도로 맨 바깥 차로,
화물차 매연을 맡으며
시속 90km로 일관되게 달리던 천안삼거리쯤,
후드득 소나기가 조수석으로 들이쳤다.
닭 다리 모양 손잡이를 뱅글뱅글 돌리자,
창문이 삐뚤삐뚤 올라갔다.
"형, 초본데 이렇게 요란스레 붙여도 되는겨?"
"응. 이래야 사람들이 피해가."
부끄러움과 맞바꾼 목숨, 어디 그것 하나뿐일까?
"야쿠르트 아줌마, 야쿠르트 주세요.
야쿠르트 없으면, 요쿠르트 주세요."
금요일 초등학교 오후 4시,
신난 아이들은 세 발 오토바이로
수레를 끄는 엄마를 발견하면 합창을 했다.
“아이고, 고객님들, 야쿠르트 하나에 백 원입니다.”
아이들에게는 씩, 웃어 보이던 엄마도,
두 달 치 슈퍼100 값을 떼먹고 도망친 고객에겐
단호했다.
도망자의 옆자리 직원을 어르고 달래
15km 떨어진 새 직장까지
한 시간에 한 대 오는 버스를 타고 쫓아가,
노란색 모자를 움켜쥔 손으로 삿대질 쳤다.
"십이만 이천사백 원 내놔유!"
엄마는 고성방가로 받은 13만 원을
전대 속 만 원 모둠에 포갠 다음
노란 고무줄을 두 번 돌려 꽉 조였다.
그리고 천 원권 네 장을 거슬러 주며 말했다.
"버스비 왕복 뺐어유."
엄마는 그 무용담을 동료 아주머니들에게
왁자지껄 털어놨다.
아무래도 실제 들인 버스비 삼천 원보다
육백 원 더 받은 게 흡족했으리라.
어쩌면 지금 나의 호사는
엄마의 남사스러운 삶 덕분일지도 모른다.
인도 없는 왕복 2차로,
맞은 편 모퉁이에서 나타난 차가
갓길의 나에게 헤드라이트를 조준했다.
나는 불 꺼진 형광색 경광봉을 오른손에 쥐고
반호를 그렸다.
난 부끄럽지 않았다.
이런 사람도 있구나, 편하게 봐주십시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