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오래전에도 가곡 관련 글을 올린 적이 있었더랍니다. 광장을 밝힌 촛불 하나, 하나를 떠올리며 소개한 '나 하나 꽃 피어'였죠. 부패하고 무능한 권력에 맞서서 모두가 촛불을 들었던 그 시간은 참 소중한 경험이고 기억이었죠.
https://www.clien.net/service/board/park/15083158CLIEN
박근혜의 국정농단도 충격적이었지만, 윤석렬 정권을 경험하면서 참담함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게 됐습니다. 소위 엘리트라는 권력층이 이렇게 상식이 없고 오만불손하고, 방자하며, 부정하다니요. 어쩌다 그들의 행태가 드러나더라도 법 기술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고, 부역자 언론은 이들의 지휘에 따라 대중의 눈을 가립니다.
그들의 무도함이 계엄으로 실체화됐다는 점이 가장 큰 충격이었습니다. 상식의 세계를 아득히 넘어선 일들을 계획적으로, 조직적으로 시도했다는 사실이 지금도 믿기지 않습니다. 비상계엄을 해제하기까지 그 찰나의 순간을 모두 지켜본 분들을 아실 테죠. 그 밤에 시민들이 뛰쳐나가 그들을 막아서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마도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끔찍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거란 걸.
말이 길었네요. 감상기를 적을 가곡은 제목처럼 이육사 시인의 광야입니다. 이육사 시인의 싯구에 지혜정 작곡가가 곡을 붙였습니다. 합창답게 수많은 목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장엄하고 웅장합니다. 특히 후렴으로 반복되는 구절은 15줄의 시 안에 꾹꾹 눌러 담긴 장대한 서사를 감동적으로 풀어냅니다.
* 합창곡인 만큼 다양한 버전이 있습니다. 원곡은 혼성 합창이지만 시작 나레이션이나, 남성 중창의 힘 있는 목소리가 비장함이 잘 표현된 것 같아 골라봤습니다.
광야 /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진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사실 이 시는 중고등학교 시절 국어시간에 참 지루하게 배웠던 그 시입니다. 천고의 시간은 무엇인지, 초인은 누구이고, 광야의 함의는 무엇인가. 수없이 많은 문제를 풀고 해답을 읽었어도, 그저 답을 맞히기 위한 지문으로, 피상적인 시였습니다. 하지만 귀로 듣는 광야는 그때는 몰랐던 것을 알게 하네요.
그때는 몰랐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설움 속 일제의 폭정에 맞서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한다는 게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일인지요. 나의 가족과 삶을 모두 내 건 항쟁. 압도적인 전력 차이로 그 끝은 어딘지 가늠할 수도 없고 승산 없어 보이는 싸움. 계엄 이후 탄핵까지 피 말리는 시간을 보낸 게 4개월 남짓, 그 짧은 시간에도 무력감을 느낀 순간이 얼마나 많았나요. 하지만 30년이 넘는 시간을 그 엄혹한 순간에 맞서는 이들의 심정이란 감히 상상할 수 없습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광야에서'
광야의 후렴 구절입니다. 수없이 반복되는 이 구절에 마음이 뭉클해집니다. 정제된 시에선 듣지 못한, 그 안에 담긴 희생과 눈물, 고통, 수난 같은 수많은 순간이 떠오릅니다. 멜로디에서도 고난과 시련의 시간을 보내는 이의 심정이 처연하게 표현됩니다. 처음엔 '노래의 씨를 뿌려라'가 반복되고 그 다음엔 '눈이 내리고'가 반복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시에는 포함되지 않은 '광야에서'가 덧붙여지며 멜로디는 클라이막스로 향합니다.
알려진 것처럼 광야는 이육사의 유작입니다. 옥중에서 사망한 뒤 그의 동생에 의해 발표된 시죠. 아마도 그는 자신의 마지막을 짐작했을 것 같습니다. 살아서는 못 볼 조국의 독립이지만, 나만의 자유와 독립이 아니기에 그의 마지막 소망과 열망을 15줄의 시에 담았습니다. 차디찬 옥중에서 그에게 남은 건 그저 '가난한 노래의 씨'뿐이었지만,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독립의 믿음을 놓지 않은 그의 외침은 값싸지도, 초라하지도 않습니다.
노래를 듣는 내내 최근 사태를 떠올려봅니다. 계엄 당일 국회로 달려가기를 주저하지 않은 시민들, 눈 내리는 광장에서 은박을 뒤집어쓰고 밤새 목소리를 외친 이들, 머리카락을 깎고 단식하며 부정에 맞서고 탄핵을 촉구했던 이들, 길이든 온라인에서든 논쟁하고 항변하며 설득하기를 애쓴 이들까지, 모두가 씨 뿌리는 마음이었겠죠.
또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군인들의 총칼 앞에 핏값을 치르면서 민주화의 꽃을 피운 광주. 목숨을 위협받으면서도 평생을 민주주의와 평화 실현을 외치며 그 길을 닦은 김대중 대통령. '그런 세상이 되기만 하면 되지, 뭐 내가 꼭 거기 있어야 되는 건 아니니까'. 온전한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불굴의 의지와 염원으로 씨를 뿌린 노무현 대통령. 그리고 그 길을 함께 걸었던 수많은 민중. 부지런한 계절이 피고 지며 또 여기까지 왔습니다.
요 며칠 동안 이 곡을 들으며 많은 위로가 됐습니다. 처음엔 이육사의 절절한 심정이 들렸습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의 독립만을 바랐던 이의 외침. 그 다음엔 지금 우리의 모습이 보이더군요.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기꺼이 쏟으면서 연대했던 사람들. 누군가에 의해 심겨진, 숭고한 노래의 씨앗이 싹을 틔워 우리를 광장에서 목 놓아 외치게 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제 시작이죠. 원상복귀를 위한 단초가 마련됐을 뿐이니까요. 내란을 옹위했던 세력들은 여전히 견고하고 단단합니다. 무엇보다 근현대사부터 이어진 거악의 권능은 깊고 넓게 뿌리내려 예상보다 더 오랜 싸움이 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제는 누군가의 외로운 싸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우리의 눈과 귀는 깨어 있으니까요.
어떤 분들에게는 가곡이 점잖은 체하는 따분한 노래일 수 있습니다. 그래도 한 번은 들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음악적으로도 참 멋진 노래거든요.
나 하나 꽃피어 / 조동화
나하나 물들어
풀밭이 달라지겠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피고
나도 꽃 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것 아니겠느냐
나하나 물들어
산이 달라지겠냐고
말하지 말아라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결국 온 산이 활활
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
아, 마지막으로 한 곡을 더 추가합니다. 처음에 소개했던 '나 하나 꽃 피어'입니다. 조동화 시인의 시에 윤학준 작곡가가 곡을 붙였습니다. 응원봉 하나에 풀밭이 달라지고, 온 산이 활활 타올랐습니다. 광장에서, 삶의 곳곳에서 응원봉을 들어온 모든 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잘 몰랐던 내용 잘 듣고 잘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