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황현필 한국사(유튜브)
이승만이 한 행동 정리
일부 추려서 정리합니다...
독립운동가 변호 거부
이승만은 독립운동가를 살인자로 매도하고, 변호할 수 없다며, 변호를 거부합니다.
이승만은 친일파
당시 조선을 비하하며, 일제의 침략 덕분에 조선이 발전되었다고 발언하였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자신의 국적을 '조선'이 아닌 '일본'이라고 표기했습니다.
독립운동가를 고발한 이승만
고작 질투심 때문에 독립운동가 박용만을 고발한 이승만입니다.
임시정부에서 탄핵 당한 이승만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탄핵되었습니다.
임시정부 수립 이후 미국에 있으면서 독립 운동 자금으로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승만의 이러한 생활로 인하여, 많은 독립 운동 자금이 새어나갔습니다.
정읍발언을 통하여 처음으로 남북 분단을 언급한 이승만
이승만 때문에 북한과 남한이 분리되어 정부가 수립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승만은 독립 당시 자신의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대통령이 될 수 없었습니다.
남한에서라도 대통령이 되고 싶어 빠르게 분단을 언급하고 초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건국대통령 아닙니다. 초대 대통령이지... 절대로 혼동되어서는 안됩니다.
이승만이 없어도 남한은 공산화 될 일이 없음
UN에서 남북한 총선거를 하기 위해 인구조사를 실시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북한의 인구 조사를 소련이 막았으며, 이때 이승만은 남한 단독 총선을 실시합니다.
만약 UN과 이야기 하여 남북한 인구 조사 후 총선을 실시 하였으면, 미군정이 있는 남한은 공산화가 되지 않고, 크게 보면 남북 분열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친일파를 보호한 이승만
친일경찰 노덕술을 보호하고, 1949년 담화문을 통해 친일파 처벌을 보류함으로써 친일파들이 후에 대한민국의 주요 요직에 들어가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김구 암살 유력 배후자 이승만
안두희 소위의 총에 맞아 사망한 김구 선생님입니다.
안두희가 김구 선생님을 죽이고 이후의 삶을 보면,
1. 이승만이 나서서 김구 암살은 한독당 내분으로 발생했다는 서명 제출
2. 친공산주의 한국독립당의 음모에 맞선 안두희로 규정
3. 안두희 소위는 재판 중 특진 이후 1년 만에 형 면제 처분 및 복귀
민간인 학살의 주범 이승만
제주 4.3사건과 여수, 순천 사건 당시 이승만은 남로당과 공산주의 무력 충돌 당시 수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제주 4.3사건만 봐도 인명 피해가 25000~30000명 정도이며, 대부분 아무런 관련 없는 민간인들 입니다.
6.25 한국전쟁 당시 런승만
런승만 사건은 너무나도 유명한 사건입니다.
6.25 북한의 남침당시 이승만은 국민들에게 안전하다는 방송을 내보내고 혼자 남으로 도망쳤습니다.
이때 남겨진 국민들은 생각 안하고 북한의 군대가 두려워 한강 다리를 폭파시킵니다.
또 다시 시작된 이승만의 민간인 학살
49년 말까지 이 조직에 가입된 수는 무려 30만 명에 달했으며, 서울의 맹원수는 19,800여 명이었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경찰은 초기 후퇴과정에서 이들 보도연맹원에 대한 무차별 검속·즉결처분을 단행했습니다.
50년 7월 21일 경북 문경군 호계면 별암리의 경우 주평 앞산에서 2백여 명, 영순면 포내마을 뒷산에서 3백여 명이 집단으로 학살당했습니다.
이같은 일은 평택 이남의 전지역에서 발생했으며, 한국전쟁 중 벌어진 최초의 집단적인 민간인 학살이었습니다.
4.19혁명으로 하야 한 이승만
헌법 개정을 통해 독재를 하고 자신의 정치적 정적들(신익희, 조봉암)을 제거합니다.
이후 이승만은 4.19혁명을 통해 하야를 하게 됩니다.
모든 출처 : 황현필 한국사(유튜브)
런승만 정리
1. 독립운동가 변호를 거부
2. 미국에서 친일파 행세
3. 자신의 질투심 때문에 독립운동가를 고발
4. 임시정부에서 탄핵 당함
5. 정읍발언으로 남북 분단 언급
6. 남한 단독 총선을 진행
7. 남북이 나뉘어지는 계기가 됨
(이때 인구 조사를 통해 총선을 하였어도 공산화 될 일은 없었음)
8. 담화문을 통해 친일파를 보호
9. 김구 선생님 암살 유력 배후
10. 공산 세력과 무력 충돌 중 너무 많은 민간인 학살(제주4.3사건, 여수.순천 사건)
11. 한국전쟁 당시 런승만(국민 버리고 혼자 살겠다고 도망)
12.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13. 한국전쟁 당시 도망 후 한강 철교 폭파
14. 헌법 개정 후 독재자가 되고, 정치적 정적들을 제거
15. 4.19혁명을 통해 하야
16. 건국 대통령 아니고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없었으면, 아마 남북이 나뉘어 지지 않았을 수도 있겠죠?
이승만이 없었으면, 수 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되지 않았을 수도 있겠죠?
이승만이 없었으면,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 졌을 수도 있겠죠?
출처 : 대전일보

출처 : TV조선
출처 : YTN
먼저 해주시다니..
감사합니다 .
솔직히 친일파들보다 더 질이 안좋은 인물로 봅니다
보일 때마다 평생 되물어야 합니다.
"이승만이 서울에서 빠져나온 것은 27일 오전으로 보여짐. 이 때 빠져나가면서 각료들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떠나버렸고, 이 때 오직 서울역에서 대통령의 피난을 알았던 것은 비서 4명 뿐이었음.
이 시간에는 창동 방어선에서 5연대와 16연대가 죽기 살기로 버티면서 미아리 방어선 구축을 위한 시간을 벌어다주던 시간임.
당연히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이 말도 없이 사라졌으니 각료들도 뿔뿔히 흩어져버렸음. 임병직 외무장관은 오전 12시 경에 자가용으로 서울을 빠져나왔고, 사수론자였던 장기영 체신장관 역시 저녁 7시를 기하여 수원으로 빠져나옴.
거의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신성모 장관도 이 즈음 한강을 건넜고, 13명의 장관 중 내무장관 백성욱을 제외한 12명이 27일 내로 수원으로 탈출하였음. 내무장관은 28일 오후 7시가 넘어서 나룻배로 한강을 간신히 건넘.
이게 무슨 문제냐고 할 수 있는데, 행정부 수반이 전쟁 수행을 해야하는 각료들에게 말도 없이 멋대로 탈출해버린 것이 문제. 각료들은 27일 오전까지만 하더라도 전쟁 수행에 대한 논의와 서울 사수에 대해서 토의를 하고 있었음.
실제로 27일 오후부터 서울 시내의 질서가 붕괴된 것도 이러한 요인이 상당히 컸음. 창동 방어선 붕괴 소식도 있었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사라졌다는 소식에 시민들이 더더욱 혼란에 빠진 것임.
거기에 갑작스럽게 취소된 천도방송 역시 혼란을 가중함. 심지어 미 대사관 및 KMAG은 자기 자리 지키면서 민간인 대피에 여념이 없었고, 27일 비상 국회를 소집한 국회 역시 대통령의 피난 소식을 듣지도 못한 채 수도사수 결의문을 가지고 갔지만 이미 텅 비어버린 행정부를 보며 그제서야 탈출 준비를 했으나 이미 늦어버림.
그 결과 수많은 국회의원들이 납북당하는 피해로까지 이어졌고, 시민들 역시 피난이 늦어지면서 많은 참상을 겪어야만 했음. 군대와 경찰은 계속해서 시가전을 주장하며 시민들을 한강 이남으로 대피시키고자 했으나 이미 그 시점이 27일 오후부터인지라 너무 늦었음.
27일 오후부터 서울역과 한강의 교량 일대는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28일에 한강교가 폭파당하면서 완전히 발이 묶여버린 것. 행정부가 저런 식으로 붕괴되지 않았더라면 더 많은 사람들이 한강교를 빠져나갔을 수 있었을 것임.
이미 28일에도 한국군과 경찰은 최후 방어선인 미아리가 돌파당했을지언정 M8 그레이하운드까지 동원하며 북한군에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었고, 그 결과 아직 한강교까지는 북한군이 접근하지 못하던 상황이었음.
상황이 가능하면 방어지역 전면에 파괴된 트럭 잔해와 노면전차를 가져다가 북한군 전차들의 진입을 저지하고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군도 꽤나 고전을 면치 못했음.
미군의 조언대로 44,000명의 한국군과 7,500명의 경찰이 제대로 통제받아 싸운다면 서울이라는 거대한 시가지를 방패삼아 북한군의 주력 9만명을 시가전의 늪에 빠뜨릴 수 있었다고 한 것도 허언이 아니었음.
그러나 수도를 떠난 자들, 그리고 그들의 대표가 무책임하게 달아나면서 행정부의 붕괴를 야기했고 이 피해는 고스란히 서울 시민들과 아직까지도 자기 자리에서 싸우며 버티고 있는 수많은 한국군 장병, 경찰, 심지어 KMAG 고문들이 뒤집어써야만 했음.
그리고 미처 달아나지 못한 이들은 잔류파로서 또다시 부역자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채 고통을 받아야만 했고. 수도를 떠난 자들의 행동은 수도에 끝까지 남아 싸우던 모든 이들의 노력을 한 순간에 배신한 사건이라 보아도 무방할 정도임.
[출처] 부록 수도에 남은 자들 2-1) 수도를 떠난 자들|작성자 오로라"
https://blog.naver.com/kkumi17cs1013/222226971807
선조는 그래도 후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승만은 명백히 적전도주 또는 탈영이죠
해당채널의 쥔장이 정외과 출신이라는건지... 하여간 비슷한 전공인 거 같은데..
1) 이승만이 국제정치학 학위까지 있는 사람이니,
말하자면 테러?(반대편의 입을 빌리자면)가 전혀 당시 조선의 억울함을 알리는데 전략적으로 하등 도움이 안된다.
스티븐스를 자기 나라인 미국영토에서 암살한 사건은 조선에 대한 이미지를 오히려 악화시켰다.
그러니까 이승만은 보편정서에 기대어서 평화적인 방법으로 독립운동이든 뭐든 해야 한다는 주의였다..
2) 하와이갱 같은 자극적인 문구로 이승만을 모략할 수 없다..
당시 이승만의 외교파와 박용만이 속한 강경파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골이 깊었고
서로가 서로를 중상모략하기 바쁜 와중에 와전된 얘기를 그대로 주워섬기는 것은 과하다.
위가 그 채널의 주장입니다.
아마도 독립운동을 폄훼하는 쪽은, 하등 도움도 안되는 폭력에 기대는 활동으로는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기가 어렵고, 그게 정말 독립에 도움이 되는지 과연 제대로 생각해봤는지 궁금하고, 이승만처럼 조선지식인의 경계를 넘어가 큰물에서 수학한 사람은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조할 수 있었기에 기존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의 유효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정도...가 반대쪽의 주장이겠죠.
https://www.clien.net/service/board/park/18104117CLIEN
그리고 하와이 법정에서 이승만이 독립운동가 박용만 측을 고발한 것은(본문의 3번 항목), 이승만이 갱단을 조직해 독립운동자금을 탈취 유용한 사건을 덮기 위한 목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단순 질투심이나 혹은 간다효 주장처럼 독립운동은 강경노선보다는 국제적 시각에서 외교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노선차이도 아니고요. 노선차이로 박용만을 고발했다는 간다효의 주장..이승만을 멋지게 포장해 주네요. 이런걸 뉴라이트라고 해야 하나요 뭐라 해야 하나요.
https://www.clien.net/service/board/park/18587916?c=true#146819978CLIEN
국당 지지자랑 정치이야기할때 이념이나 성향이런거 해봐야 도돌이표죠. 그냥 누가 부정부패와 도둑질이 많았는가만 이야기하면 좋을거 같아요.. 그게 정치의 본질이잔아요
이승만에 대한 오해라니 ㅋㅋ
진짜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하고앉았네요 ㅋㅋ
국민을 학살한건 뭘로 해도 쉴드가 안되는데
찾아보니 의사네요?????????????????????? 그리고 광주 출신 -_-..............
광주 호랑이 분들 품에서 개 한마리가 나왔네요
루마니아 혁명때 제일 잘한게 도망가는 차우세스쿠 잡아다 바로 총살해버린겁니다
박정희도 이승만이 나라 망쳤다고 욕했죠.
쭉 보다가 중간에 여수순천이 ‘유’수순천으로, 신익희선생 이름이 신익‘히’로 오타난 곳이 보여서 알려드립니다
수정 완료하였습니다.
정말 이승만은 까도까도 최악의 인물이었어요.. 좀 더 제대로 이승만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 합니다.
답답해서 한마디 적어봅니다.
김범우: "만악 우남이 해방 전에 죽어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학송: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아마 김구, 박헌영, 여운형이 주도권 다툼을 했을지도 모르겠지."
개소리로 힘들때마다
솔루션이 되어주는 클리앙
ㅜㅜㅜ 작성자님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