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면서>
안녕하세요.
최근 글을 쓰다보면 항상 주장이라는 것은 반대의견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절대적인 정답이 있는 이야기는 아니니 가볍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유튜버 미미미누는 「미미미생」이라는 시리즈를 운영합니다.
- 실제 기업의 신입사원으로 출근해 며칠간 일해 보고, 마지막에 회사 사람들 앞에서 PT를 하는 형식입니다.
- 2026년 4월과 6월 이 시리즈의 LG생활건강 편이 두 편으로 나뉘어 공개됐습니다.
- PT 영상 한 편의 누적 조회수는 507만 회를 넘었습니다(2026년 9월 기준).
☐ 그리고 몇 달 뒤, 숫자가 움직였습니다.
제품은 이미 2년 전에 나와 있었습니다
☐ 화제가 된 제품은 ‘피지 모락셀라’ 세탁세제입니다.
- 빨래 쉰내의 원인균인 모락셀라균, 정확히는 그 균이 만들어내는 4M3H라는 물질을 제거하는 것을 내세운 제품입니다.
- 2024년에 처음 출시됐으니 유튜브 영상이 올라온 시점에는 이미 2년 차 제품이었습니다.
- 성능 평가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 2025년 피지 브랜드의 66% 매출 성장을 견인했고, 글로벌 시장 조사 기관 민텔이 선정하는 ‘2026 민텔 최고 혁신상’ 아시아 태평양 생활용품 부문에도 이름을 올렸습니다.
☐ 문제는 인지도였습니다.
- 세탁 세제를 고를 때 세척력을 따지는 사람은 많아도 모락셀라라는 이름을 알고 찾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 좋은 제품이라는 사실과 사람들이 그 제품을 안다는 사실은 별개의 일입니다.
숫자가 움직였습니다
☐ 2026년 7월 월간 판매 실적 기준으로, ‘피지 모락셀라 냄새 제거 세탁 세제 코튼향 2.1L’가 쿠팡 세탁세제류 부문 전체 1위에 올랐습니다.
- 일반 세제부터 섬유 유연제까지 모두 포함한 순위입니다.
☐ 같은 브랜드의 ‘냄새 제거 부스터 코튼향 26입’도 캡슐·시트세제 부문 1위를 기록했습니다.
- 1월부터 7월까지 쿠팡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316% 늘었습니다.
☐ 네이버 상반기 할인 행사에서는 생필품 카테고리 판매액 1위를 기록했고, 상반기 전체 매출도 전년 동기 대비 229% 이상 증가했습니다.
☐ 영상이 공개된 것이 4월과 6월이고, 1위 발표가 8월 초입니다.
- 시간 순서만 놓고 보면 이야기가 붙은 뒤에 판매가 뛴 것처럼 읽힙니다.
다만 이야기 하나가 전부를 만든 것은 아닙니다
☐ LG생활건강이 성장 배경으로 제시한 항목은 여러 개입니다.
- 제품의 세척력과 냄새 제거 기술이 먼저 있었고, 인플루언서 협업이 있었고, 여름철에 맞춘 제품 샘플링과 온라인 캠페인, TV 광고가 있었고, 사용자 후기가 소셜 미디어를 통해 퍼진 흐름도 있었습니다.
- 유튜브 영상은 그중 하나입니다.
☐ 계절 요인도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 빨래 쉰내는 장마철과 한여름에 가장 심해지는 문제이고, 1위를 기록한 달이 7월입니다.
- 같은 영상이 1월에 올라왔다면 결과가 같았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 그래서 ‘스토리가 매출을 만들었다’는 문장은 조금 과합니다.
- 정확히 쓰자면, 이미 작동하던 제품이 이야기를 통해 훨씬 많은 사람에게 도달했고, 도달한 시점이 수요가 가장 큰 계절과 맞았습니다.
왜 사람들은 이야기에 반응할까
☐ 그렇더라도 여러 요인 중에 왜 하필 이야기가 도달 범위를 넓히는 역할을 맡게 되는지는 따로 물어볼 만합니다.
- 이 질문에 대해서는 오래된 실험 두 개가 꽤 명확한 답을 줍니다.
☐ 첫 번째는 기억의 문제입니다.
- 1969년 고든 바우어와 M.C. 클라크는 참가자들에게 명사 10개짜리 목록 12개를 외우게 했습니다.
- 한 집단은 평소처럼 외웠고, 다른 집단은 그 열 단어를 엮어 말이 되는 짧은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 방금 외운 직후에는 양쪽 모두 거의 다 기억했습니다.
- 그런데 12개 목록을 전부 학습한 뒤 다시 물었더니, 이야기를 만든 집단은 중앙값 93%를 회상했고 대조군은 13%였습니다.
☐ 두 집단이 받은 정보의 양은 같았습니다.
- 형식만 달랐습니다.
- 그러니까 이야기는 정보를 줄여 주는 장치가 아니라 나중에 그 정보를 다시 꺼낼 경로를 만들어두는 장치입니다.
☐ 두 번째는 의미 부여의 문제입니다.
- 1944년 프리츠 하이더와 마리안네 지멜은 큰 삼각형, 작은 삼각형, 원이 화면을 돌아다니는 2분 30초짜리 무성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보여 주었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적으라”고 했습니다.
- 도형에는 얼굴도 대사도 없었습니다.
- 그런데 참가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도형을 살아 있는 존재로 서술했습니다.
- 큰 삼각형은 못된 성격의 가해자가 되고, 작은 삼각형과 원은 쫓기는 쪽이 됩니다.
- 심지어 삼각형 둘이 원을 두고 다투는 이야기로 읽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 사람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야기가 없는 자리에도 이야기를 만들어 넣습니다.
- 그래서 제품에 이야기를 붙이는 일은 없던 기능을 이식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 이미 켜져 있는 회로에 재료를 넣어 주는 작업에 가깝습니다.
- 재료를 넣지 않으면 소비자는 각자 자기 방식대로 빈칸을 채웁니다.
☐ 칩 히스가 스탠퍼드 수업에서 반복해 온 실습도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 학생들에게 범죄 통계를 주고 1분짜리 찬반 스피치를 시킨 뒤, 잠깐 다른 일을 하게 하고 무엇이 기억나는지 적게 하는 실습입니다.
- 평균적으로 한 사람이 통계를 두세 개 인용했고 이야기를 쓴 사람은 열에 하나였는데, 회상 결과는 이야기 63%, 개별 통계 5%였습니다.
- 통제된 실험이 아니라 강의 실습이라는 점은 감안해야 하지만 앞의 두 연구와 결이 어긋나지는 않습니다.
☐ 이 세 가지를 합치면 사람이 이야기에 반응하는 이유는 취향이 아니라 처리 방식 때문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 목록은 항목 단위로 들어와 개별적으로 사라지고 이야기는 인물과 목표와 장애가 서로를 붙들고 있어 통째로 남습니다.
☐ ‘4M3H를 99.9% 제거한다’는 문장에는 붙들 곳이 없습니다.
- 그런데 신입사원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아이디어를 내고, 그것이 회의에서 깨지고, 다시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붙들 곳이 있습니다.
잘 만드는 일과 알리는 일은 다른 일입니다
☐ 제품 개발은 ‘이 제품이 무엇을 해결하는가’를 푸는 일입니다.
- 마케팅은 ‘그 해결이 왜 내 문제인가’를 상대가 저장할 수 있는 형태로 옮기는 일입니다.
- 두 작업은 필요한 능력도, 잘하는 사람도 다릅니다.
☐ 모락셀라 사례가 흥미로운 지점은 두 번째 작업이 회사 밖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 회사가 만든 광고는 성분과 제거율을 말합니다.
- 틀린 말은 아니지만 목록의 언어입니다.
- 반면 유튜브 영상에 담긴 것은 사람이 겪는 어색함과 실패와 수정이었습니다.
- 사람들은 후자를 끝까지 봅니다.
☐ 기술 사양은 기억되지 않고, 이야기는 기억됩니다.
- 제품이 아무리 좋아도 기억되지 않으면 매대에서 선택받지 못합니다.
- 부가가치는 제품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제품과 소비자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과정에서도 만들어집니다.
☐ 물론 순서가 뒤바뀌면 곤란합니다.
- 이야기가 먼저 퍼지고 제품이 기대에 못 미치면, 확산 속도만큼 빠르게 실망도 퍼집니다.
- 이야기가 기억을 오래 붙든다는 말은 나쁜 경험도 오래 붙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 이 사례에서 이야기가 작동한 이유는 그 뒤에 실제로 쉰내를 잡는 제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이야기는 제품을 대신하지 못하고, 제품의 가치를 전달 가능한 형태로 바꿔 줄 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 제품을 만들 때 기능 목록은 자연스럽게 정리됩니다.
- 성분, 성능, 가격, 경쟁 제품 대비 우위 같은 것들입니다.
- 그런데 ‘이 제품을 어떤 이야기로 설명할 것인가’는 개발 항목에 잘 들어가지 않습니다.
- 대개 다 만든 다음에 홍보팀에 넘기는 일로 취급됩니다.
☐ 앞으로는 기획 단계의 문서에 항목을 하나 더 넣어 놓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
- 이 제품이 누구의 어떤 하루를 바꾸는지, 그 장면을 한 문단으로 쓸 수 있는지.
- 그 문단이 안 써지면 기능 정리가 덜 된 것이고, 써지면 그것이 나중에 이야기의 뼈대가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