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종종 컴퓨터 앞에서 자료를 보다보면 일에 압도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 폴더를 열면 파일이 쏟아지고
- 이메일은 스크롤해도 끝이 보이지 않고
- 문서 하나를 열면 관련 문서가 서너 개씩 딸려 나옵니다.
- 일의 양은 한없이 많아 보이고 불안은 점점 증폭됩니다.
☐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 같은 자료를 몇 장 출력해서 회의실 책상 앞에 놓고 보면
- 생각보다 그렇게 많은 양이 아닐 때가 있습니다.
- 분명 같은 일인데, 화면으로 볼 때와 종이로 볼 대 느껴지는 무게가 다릅니다.
☐ 저는 이것이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니라
- 화면이라는 매체가 우리 뇌에 작동하는 방식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화면 속의 일에는 경계가 없습니다.
☐ 컴퓨터로 자료를 보면 몇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나기 쉽습니다.
☐ 첫 번째는 일의 규모가 부풀려 보인다는 것입니다.
- 파일, 폴더, 이메일, 과거 자료 등이 끝없이 이어져서 전체 일의 규모가 과장되어 느껴집니다.
- 종이 서류는 두께가 곧 분량입니다.
- 손에 쥐어보면 ‘이만큼이구나’하고 감이 옵니다.
- 안 올 수도 있지만 대강은 알 수 있습니다.
- 반면 화면 속의 일은 부피가 없습니다.
- 수백 개의 파일 숲 속으로 흩어져 있으면 뇌는 숲 전체를 일감으로 인식합니다.
생각이 자꾸 옆길로 샙니다
☐ 두 번째는 주의가 계속 분산된다는 것입니다.
- 검색을 하고 다른 문서를 열다 보면 생각이 계속 옆으로 뻗어나갑니다.
- 원래 보려던 문서를 확인하다가 관련 이메일이 떠올라 메일함을 열고
- 메일함에서 새로 온 메일을 발견하고
- 그 메일에 답하려다 다른 파일을 찾게 됩니다.
☐ 문제는 이렇게 옮겨 다닌 흔적이 머릿속에 남는다는 점입니다.
- 조직심리학자 소피 르로리는 이것을 ‘주의 잔여물’이라고 불렀습니다.
- 하던 일을 끝맺지 못한 채 다른 일로 넘어가면
- 이전 일에 대한 생각의 일부가 그대로 남아 다음 일의 집중을 갉아먹는다는 것입니다.
- 화면 위에서 우리는 이 미완의 전환을 한 시간에도 수십 번씩 반복합니다.
- 끝맺지 못한 일이 머릿속에 층층이 쌓이니
- 실제 일의 양과 무관하게 ‘해도 해도 끝나지 않는다’는 감각이 만들어집니다.
‘어디까지 봤는지’가 몸에 남지 않습니다
☐ 세 번째는 진행의 흔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 종이 자료는 읽은 만큼 옆에 쌓입니다.
- 책도 읽은 만큼 페이지가 넘어가 있어서
- 손끝의 두께만으로 ‘절반쯤 왔구나’를 압니다.
- 그런데 화면에는 ‘어디까지 봤는지’가 물리적으로 남지 않습니다.
- 스크롤바는 창을 닫으면 사라지고
- 어제 본 파일과 아직 안 본 파일이 폴더 안에서 똑같은 아이콘으로 나란히 있습니다.
- 그러다 보니 이미 봤던 화면을 다시 열어보기도 하면서, 일이 끝나지 않는 느낌이 지속됩니다.
☐ 스페인 발렌시아 대학의 파블로 델가도 연구팀은
- 종이와 화면의 읽기 이해도를 비교한 수십 건의 연구를 종합하는 메타분석을 수행했는데
- 종이로 읽을 때 이해도가 더 높다는 결과가 일관되게 나타났습니다.
☐ 진행의 흔적이 없으면 뇌는 그 일을 ‘아직 끝나지 않은 일’로 계속 붙들고 있게 됩니다.
- 끝나지 않는 일이 완료된 일보다 더 오래, 더 집요하게 머릿속을 차지한다는 것은
- 심리학에서 ‘자이가르닉 효과’로 알려져 있습니다.
- 화면 위의 일은 구조적으로 ‘끝났다’는 신호를 주지 않기 때문에
- 퇴근하고 나서도 마음 한구석에서 계속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 그렇다고 모든 자료를 출력할 수는 없습니다.
- 정말 중요한 검토만 출력해서 하는 겁니다.
- 복잡한 계약서나 긴 보고서처럼 이해도가 중요한 자료는
- 출력하는 몇 분의 수고가 화면 앞에서 헤매는 몇 시간을 아껴줍니다.
☐ 화면에서 일할 때는 시작하기 전에 ‘볼 것의 목록’을 먼저 적습니다.
- 할일을 노트에 먼저 적어놓고 그 목록만을 실행하는 겁니다.
- 이것은 다른 일에 빠지고 싶은 욕망을 조금 더 잡아줍니다.
☐ 일이 감당이 안 되게 느껴지는 날, 어쩌면 일이 많은 것이 아니라 일의 경계가 보이지 않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 그럴 때 잠시 화면을 끄고, 해야 할 일을 종이 위에 적어보세요.
- 안개가 걷히고 나면 산은 생각보다 낮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