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로 사회에서 여러 모습들을 봅니다.
그중에 과학적이고 투명한 대처를 해나가고 있는 질병관리본부 및 정부의 모습과,
전근대적이고 비합리적인 대응을 하고 있는 신천지교 및 일부(그러나 다수) 기독교의 모습을 보고 느끼는 바가 있어 글을 적어 봅니다.
합리적인 현대사회에서 기독교인이 교양있는 시민으로서, 그리고 건강한 종교인으로서 양립하기 위한 몇가지 생각들입니다.
뒤로 갈수록 떠오르는 주제대로 두서 없이 적다보니 제목 값은 못할 것 같습니다.
0. 들어가기에 앞서
ㅡ 이 글이 대상으로 하고 있는 사람은 개신교인입니다. 특히 [기독교와 사회], [과학과 종교] 등등을 놓고 고민 중이신 분들께 약간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ㅡ 특별한 언급이 없으면 이 글에서 말하는 기독교는 개신교를 지칭합니다.
ㅡ 여기서는 집단이 아닌 개인을 다룹니다. 사실 최근에 문제가 되고 있는 건 '기독교 집단'의 폐해가 크지만, 우선 '크리스천 개인'의 합리성을 먼저 갖추는 게 출발이라고 생각합니다.
ㅡ 글쓴이는 모태신앙 30년이며 교파는 감리교도입니다.
자, 본론입니다. 합리적인 기독교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기독교와 내가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인정하자.
무엇이 합리적이고 어떤 게 비합리적인지 구분할 수 있어야 '합리적인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동어반복적인 설명이지만 기독교인이라면 이런 설명방식, 익숙하시죠?
종교란 원래 비합리적인 것입니다. 종교를 믿는 종교인은 당연히 비합리적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비합리적이라는 걸 받아들이지 않거나 아예 그런 의식이 없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1-a. 왜 인정하기 어려울까?
기독교인은 그가 속한 집단문화 특성상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나누는 데에 익숙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옳은 편'에 속하고 싶어하지요. 현대사회에서 '옳음'의 기준은 '합리성'이라는 게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두 번의 세계대전과 포스트 모더니즘을 거친 후에도 말이지요.
'옳은 편이고 싶은' 기독교인은 자기도 합리적인 현대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사고방식과 말과 행동에 비합리성이 뭍어나옵니다. 본인이 알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을 뿐이지요. 무종교인이 보기에 기독교인이 위선적이라고 느끼는 이유는 본질적으로 여기에 있습니다.
1-b. 인정하는 것이 겸손
사실 사람이 비합리적이라는 것은 그렇게 새로운 사실도 아니고 부끄러워해야할 일도 아닙니다. 누구나 삶 속에서 비합리적인 부분을 안고 있고, 사람이 의사결정을 감정에 맡기는 일은 매우 흔한 일이기까지 합니다. 기독교인은 그게 종교로 드러날 뿐인 거지요.
자기가 비합리적이라는 걸 인정하는 게 기독교인으로서 겸손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여러 갈등상황을 피할 수 있습니다. '겸손'은 사랑과 더불어 기독교가 강조하는 최고의 가치이기도 합니다. 신이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여, 자신이 인간의 모습(예수)으로 내려온 것을 '겸손'이라고 표현하곤 하죠. 겸손은 타인에게 다가가고 타인을 사랑하기 위한 첫번째 자세입니다.
2. 창조과학은 거르자
과학에 관심을 가지고, 종교와 과학을 조화시켜보려고 하는 기독교인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가 '창조과학'에 손을 대는 것입니다. 과학에 관심이 생겨서 창조과학을 공부하는 것은, 안타깝게도 과학으로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는 행동입니다. 정말로 과학에 관심이 생기셨다면 창조과학을 알아보지 마시고, 제대로 된 과학을 탐구하시는 것이 백번 낫습니다.
왜냐하면 창조과학계의 목적이 '과학적 진리 탐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과학이 아닙니다. 그 목적은 아시다시피 소위 '창조론'의 증명과 신의 존재증명이지요. 창조과학계에서는 소위 '창조론'을 증명하기 위해 Ad Hoc을 동원하기 일쑤이고 신은 애초에 반증가능성이 없는 대상인데, 이를 연구한다는 것은 이미 '과학'이 아닙니다.
2-a. 과학이 궁금하면 이런 걸 참조하세요
① 과학철학은 필수입니다. 너무 깊게 들어가실 필요도 없고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쉽게 풀어쓴 교양서, 칼럼 등만 읽어보셔도 충분합니다.
② 반증가능성이 무슨 개념인지는 반드시 이해하세요. 꼭입니다. 이걸 이해하지 못하면 과학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반증가능성이라는 개념자체를 오용*하기도 하던데...(*글 마지막에 첨언 합니다) 이 개념을 꼭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수많은 종교vs과학 논쟁에서 자유함을 얻으실 수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꼭, 제발, 좀! 제가 이렇게 사정사정 부탁드립니다.
③ 과학적 교양을 쌓고 싶다면 월간 잡지 <Newton>을 추천합니다. 상세하고 미려한 그래픽이 특징인 잡지입니다. 월간 구독도 괜찮지만 일종의 특별판인 <Newton Highlight>를 더 추천드려요. 월간 뉴턴은 동네 도서관에 대부분 비치되어 있습니다. 단점이 있다면 이시국... 과학에는 국경이 없다고 믿고 싶습니다.ㅠ
④ 다큐멘터리는 <NGC 코스모스>가 최고 존엄입니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⑤ 우종학 교수님의 책이나 SNS에 남기시는 글들, 영상들이 지표로 삼을만합니다.
2-b. 왜 창조과학을 거르라고 하냐면
창조과학이 '과학'에 관심 있는, 그리고 과학과 종교 사이에서 고민하는 많은 성도들에게 '과학적인' 답을 주지 못한다고 저는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종교는 비합리적이다'와도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인데, 종교와 신앙은 믿음체계이자 삶의 행동양식이지 과학적 증명의 대상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믿음을 쌓는 데에는 믿음으로 충분하지 증명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창조과학을 너무 격하게 부정해서 당황스러운 분도 계시겠지만 저는 꼭 말해야겠습니다. [창조과학으로 여러분의 믿음이 강화되지 않습니다.]
2-c. 과학을 존중해주세요
꽤 많은 기독교인들이 창조론vs진화론을 생각하며 이 둘이 첨예한(...) 대립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과학자들은 대부분 여기에 관심이 없습니다. 종교나 신은 과학의 연구대상이 아니고, 연구비도 안 나오니까요. 앞서 말한 '반증가능성'을 이해하셨다면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실 겁니다. 물리학자들 생물학자들은 종교에 아무런 악의도 없으며 단지 '사실'을 말할 뿐입니다. 우리는 이들 전문가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 어쩌란 말이냐, 과학을 인정하면 창조가 틀렸고 성경이 틀렸다는 말이냐, 너 이단이냐?라고 말하시면 곤란합니다.
여러분이 과학을, 우주탄생을, 진화론을 인정하시건 아니건 간에 과학은 사실이고 우리 눈앞의 현실입니다. 지동설을 부정한다고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게 됩니까? 충분히 검증을 거친 현대 과학을 부정하는 건 천동설에 매달렸던 중세 기독교와 다르지 않은 태도입니다. 중세 기독교가 세계관을 고쳐야 했듯이 우리도 변해야 합니다. 이미 백수십년 전에 했어야하지만 말이죠.
우리가 과학을 받아들이면 당장에 성경과 수많은 모순이 생기지요.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비판적 시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거는 이어서 이야기 하겠습니다.
3. 성경을 비판적으로 읽는 걸 두려워하지 말자.
이 글을 쓰는 저는 성경 해석에 대한 어떠한 권위도 없기 때문에 조심스럽습니다. 그래서 상식과 사실 수준에서 짧게만 쓰겠습니다.
3-a. 성경 각 권은 개별 저자가 있다
성경의 저자가 누구입니까?라고 물으면 으레 '하나님'이라고 대답하지만 그건 신앙적 고백에 가까운 답변이고 실제로는 성경 각 권마다 저자가 있습니다.(작자 미상 제외) 저자가 있다는 말은 다시말해 기록한 인물이 있다는 뜻이고, 그 사람의 성향, 그 사람이 살던 시대, 문화의 영향도 담겨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저자가 여럿이기 때문에 상호모순도 있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3-b. 목사님도 알고 계신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들은 비밀도 아니고 불경스러운 생각도 아닙니다. 목사님이 교회 강단에서는 그다지 이야기 하지 않지만 신학대학에서 다들 배우는 것이죠... 인터넷에서 접하는 성경의 오류들, 고민하지 마시고 교회 목사님 전도사님에게 가져가서 기탄없이 물어보세요. 대개 속시원히 답은 못해주시지만(?!) 그분들이 그 사실들을 이미 알고 계신다는 것이 어려분들에게 꽤나 위안이 되긴 할 겁니다.
3-c. 구약은 특히 신화적으로 읽으세요
앞에서 못다한 과학 이야기를 마무리 짓겠습니다. 구약은 전승과 기록된 시기가 청동기 시대입니다. 구약을 신화적으로 읽고 해석하는 것만으로도 과학적 모순을 대부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과학과 종교의 무의미한 충돌을 피할 수 있는 것이지요. 다시금 강조하지만 성경은 고대 시대로 거슬러 갈수록 고대인의 세계관이 반영된 신화적 색채가 강해지는 반면, 현대과학은 사실입니다.
3-d. 어려운 문제입니다
사실 성경에 대해 저같은 평신도가 왈가왈부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저보다는 신뢰할 수 있는 가까운 목사님과 전도사님의 이야기를 들어보시고, 한번쯤은 다각도에서 성경 내용을 바라보시는 건 어떨까 합니다. 다만 저 자신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현대인이고, 성경도 마땅히 현대인의 관점에서 읽어야한다고요. (신약시대 사람들도 자기들의 기준으로 구약을 읽었을 겁니다.)
4. 무속적인 현실해석은 자제하는 것이 좋습니다.
무속적인 해석의 예를 들어보자면 이런 게 있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창궐은 신천지 이단을 향한 하나님의 징벌이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이 진술에 아무런 문제를 못느끼시겠지만, 사실 이건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는 전근대적 해석입니다. 이런 주장이 왜 나오는지, 왜 문제인지를 논하기 전에 우선 종교의 기능을 먼저 이해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4-a. 종교의 두 가지 기능
아득한 옛날부터 종교는 세상의 현상을 설명한다는 기능과 행동강령을 제시하는 기능이 있었습니다. 쉽게 말해 '세상은 왜 이런지,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종교가 대답해주는 것이지요.
현대사회로 들어오면서 '세상을 설명하는 역할'은 이제 종교의 손을 떠났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천둥번개가 치는 것이 제우스의 분노가 아니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세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지금은 과학이 있고 전문가들이 있습니다.
4-b. 무속적인 해석의 함정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창궐은 신천지 이단을 향한 하나님의 징벌이다."라는 주장으로 돌아가보지요. 이 주장은 대개 "이단을 척결해야한다."라는 행동강령으로 이어집니다. 기독교 내부의 결속도 다지고 이단도 배제하는 정말 편리한 해석입니다. 제가 이런 주장을 무속적이고 전근대적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보편타당한 해석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지요.
기독교인들에게는 입맛에 맞는 해석일 수 있으나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여기저기 구멍 투성이입니다. '하나님의 징벌이라면 신천지와 관련없는 감염자는 왜 있나?', '신천지가 없었으면 우리나라에 코로나 감염자도 없었는가?' 등등등 설명할 수 없는 반론들이 생기기 마련이고 기독교 측에서 여기에 대응하려면 다시금 억지주장 억지논리를 펼 수밖에 없어집니다. 제가 그래서 이러한 주장을 싫어합니다.
세월호 사건 당시... 입에 담지도 못할 주장을 강단에서 내뱉은 목사들이 있었지요. 무속적인 현실해석은 정말로 현대사회와 맞지 않습니다. 정말 그만둬야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4-c. 어떠한 해석이 합리적이면서 기독교적인가
저보고 최근의 사태를 해석하라면 저는 이렇게 하겠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우리 주변에는 어려운 이웃이 있다. 성경은 구약 신약 모두 어려운 이웃과 나그네를 도우라고 명령하고 있다. 지금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병환 중에 있는 모든 사람들, 그들을 위해 노력중인 의료 종사자들, 확산을 추적하고 억제하기 위해 불철주야 고생중인 관료들, 그리고 나아가 신천지교도들까지도 어려움에 처한 이웃이다. 그들을 돕는 것이 기독교인의 사명이다.
지금 사태에 이웃을 돕는 구체적인 방법은 기독교인이라고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정확히 민주사회 시민으로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행동하면 됩니다. 클리앙에도 많이 공유되고 있는 마스크 안 사기 운동, 사회적 거리두기 운동, 혹 마스크가 충분하다면 주변인에게 나눠주는 등 상식적이고 규율에 맞는 모든 행동들이면 충분하다고 봐요.
종교에 기반한 종교적 해석(무속적 해석)은 개인의 신념과 양심에 머무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조금 여유를 두자면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는 집단 내에서까지는 뭐 괜찮겠죠. 저라고 무속적인 해석을 안 하는 게 아닙니다. 저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때나 힘든 때에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보곤합니다. 다만 그 생각을 나의 믿음, 내 신앙의 뿌리로 삼을 뿐이지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는 않아요.
제 글이 얼마나 영향이 있을진 모르겠습니다.
몇몇 사람에게라도 좋은 참고가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물론 제 생각들도 틀렸을 수 있습니다. 의견을 주신다면 저 나름대로 자문을 구하고 성찰해보겠습니다.
근래 한국 기독교의 비합리성을 자각하고 계신 성도분들은 안팎으로 힘든 경우가 많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저와 생각이 완전히 일치하시진 않더라도 같이 힘냈으면 합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 되어야하지 않겠어요?
*진화론에 대해 아무렇게나 하는 이야기.
ㅡ 과학철학을 어느 정도 이해하신 기독교인 중에는 이런 말을 하는 분이 꽤 있습니다.
ㅡ "진화론도 여러 이론 중에 하나다. 틀릴 수도 있다."
ㅡ 저도 기독교인이라 이런 분을 굉장히 자주 보는데요,
ㅡ 저는 저런 표현이 조금 불쾌합니다.
ㅡ 틀린 말은 아닌데,
ㅡ 굉장히 많은 것들이 누락된 표현입니다.
ㅡ "김연아는 여러 피겨 스케이팅 선수 중에 한 명이다."
ㅡ 이 말도 뭐 틀린 말은 아니죠.
ㅡ 하지만 이게 제대로 된 표현이라고 누가 생각할까요.
ㅡ 김연아 선수를 설명하라면 최소한 이럴 겁니다.
ㅡ "김연아는 피겨 역사상... (수많은 수식어)... 최고의 선수이다."
ㅡ 진화론도 마찬가지입니다.
ㅡ 진화론은 "생물의 진화를 설명하는 가장 설득력있는 이론이고, 현재까지 반박 반증되지 않고 있는 견고한 이론이다."
ㅡ 이걸 기독교인만 모릅니다. (답답)
그럼 결국 종교의 비합리성을 믿고 현대 과학을 존중하면 신앙이 없게 되는 걸까요?
그러한 사람은 기독교의 관점에서는 구원받지 못하는 건가요?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기독교인은 다소 비합리적일 수 밖에 없는 걸까요?
기독교인들에 빙의해서 이해해보고 싶은 사람으로서 좀 궁금해지네요.
교회는 언제나 새로운 시대가 열릴 때마다 성경을 새롭게 해석해야 했고 지금(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도 그러한 과도기적 시간을 지나고 있다고 봅니다.
물론 이러한 패러다임 쉬프트가 일어난다고해도 모두가 다 위의 서술한 글처럼 믿지는 않을 것입니다. 진보적으로 사고하고 시대의 흐름을 타고 성경해석을 다르게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끝까지 보수적으로 믿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저도 기독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항상 고민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저 역시도 많이 고민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말씀하신 것에 상당히 공감합니다.
그런데 합리성이 옳음과 그름의 기준이 된다면 기독교인이 스스로를 비합리적이라고 인정해야 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합리성과 옮음이 등치되는 범주일지요
절대자 '신'의 뜻이기 떄문에 객관적 논리가 필요 없거든요.
해당 종교를 믿는 분들을 위해 날조나 과장같은 단어를 붙이지는 않더라도 이정도만이라도 설명해주시는 종교인이 있엇으면 하고 늘 바래왔긴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부정하는 순간 종교에서 말하는 절대적 존재가 퇴색되어 버리기에 창조과학이라는 괴랄한 학문이 연구되고 있는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결론을 정해두고 가설과 실험을 맞춰가는 과학이라...
한국 개신교는 사고를 멈추고 안전한 틀 안에만 머무르는 것 같습니다.
창조과학(젊은지구론)은 미국의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쪽 성경해석에 근거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극보수적인 성경신학을 갖고 있습니다.
반면 기독교 전통이라 할 수 있는 어거스틴, 칼빈 등은 유신진화론적 태도를 가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기독교 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조론/진화론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은 성경의 해석론과 연관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 창조과학의 젊은지구론
- 성경은 그 시대 배경을 바탕으로 이해해야 한다 = 성경에 대한 다양한 접근과 해석이 가능
최근 한국에도 해당 내용에 대해 소개하는 책들이 꽤 나왔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아래 만화정도는 읽어보는 것 추천합니다.
(만화) 창조론 연대기 https://holywaveplus.com/138/?idx=196
(두꺼운책) 창조론자들 https://holywaveplus.com/135/?idx=164
저 역시도 과학도로써 고민했던 부분들인데 결국은 비슷한 결론이 나더군요
종교는 종교고 과학은 과학이다..둘이 결합지을 필요가 단 1도 없다
물리를 공부한 제가 모세의 구름기둥 불기둥을 이해할 수없고
화학을 공부한 제가 가나안마을 포도주의 기적을 이해할 수 없으며,
생물을 공부한 제가 처녀잉태를 이해할 수는 없는거죠
말씀하신것처럼 저도 신학을 공부한건 아니니 조심스럽습니다만,
현대의 기독교적 가치관은 바뀌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불교의 가치관이 무엇일까요..? 부처님의 자애로우심을 따라 사는것, 번뇌에서 벗어나 평화를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기서 불교라는 단어를 기독교로 바꿔도 전혀 이상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제가 생각하는 기독교적 가치관도 글쓴님이 이야기하신 부분에 매우 동감이 됩니다.
긍휼. 규제. 예수님의 생애흔적을따라 왼뺨을 때린자에게 오른뺨을 내어주고, 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는것..
현대의 기독교는 너무나도 편협하고 욕심이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딴소리로 샜지만 여튼
지금 시대는 뒷받쳐주는 백데이터가 없으면 사람들이 쉽게 믿지않는 매우 과학적인 시대입니다
순환논리로 어거지 주장을 펼치는 종교가되기보다는
정겨운 두레, 품앗이가 있는 순환을 보여주는게 기독교가되었으면 하는 마음에..너무 기나긴 리플을 남겨보았습니다..ㅎㅎ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제자들, 후학들은 끝내 그들을 신격화해버리고 다시 종교를 만들어버립니다.
석가모니에게 다시 브라만교와 힌두교의 껍데기를 씌우고, 예수에게 다시 유대교의 껍데기를 씌워 신으로 만들었죠.
극락이니 미륵보살이니 하는 미신적인 걸 뺀 석가모니의 깨달음 자체,
야훼니 천국이니 종말 등의 미신적인 걸 뺀 예수의 가르침 자체는 우리의 문명에 좋은 아이디어를 제공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예수 같은 경우는 억압과 폭력에 대응하는 인간으로서의 한 원형을 보여주죠.
김대중, 전태일, 킹 목사 등이 살아간 삶이 일견 예수 같은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제도종교로서의 기독교 등 야훼 종교들은 오히려 예수가 저항했던 시스템, machine이 되었죠. 예수의 간판을 단 적그리스도랄까.)
그런 식으로의 예수의 삶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현대 사회와 어울리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겁니다.
예수에다가 유대교의 야훼 미신을 덧붙여서 종교 놀음을 하려는 사람들이 지금 우리의 골칫덩어리인 것이지...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410291921451#csidx6fe001297bc626c99d93f97841f65db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이 현대 천주교라는 정답이 있는데요 뭐
잘 읽었습니다.!!
성경 무오류설 하나로 일체의 논쟁이나 의문을 억압적으로 정리합니다. 만약 의문이 든다면 마귀의 소행으로 인한 시험으로 치부하는 풍토가 점점 이상하고 반 사회적인 발언을 하는 목사들을 탄생케 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신자들이 성경에서 힘들어 하는 것은 모세의 기적이나 예수님이 행한 기적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건 믿고 안믿고의 문제지만 믿는 이들을 도덕적으로 힘들게 하진 않지요.
구약에서 유대인들이 가나안을 차지하기 위해 했던 가나안 원주민에 대한 학살이나, 바빌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근본으로 돌아가자면서 했던 외국인 혐오등의 배타적이고 현대의 윤리 인권의식에 반하는 역사를 신자들에게 어떻게 설명하느냐의 태도의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젊었을 때 교회에서 제일 괴롭혔던 문제도 이스라의 가나안 침공이죠. 예리코 성을 함락할 때 하느님이 이스라엘에게 한 명령은 현대의 기준만이 아니라 고대의 기준에도 너무 잔악했습니다. 이에 대해 개신교애 있을 땐 불순종한 이방민족의 징벌 정도로 치부하고, 그 참혹한 명령을 듣지 않아 결국 후환을 남겨둔 이스라엘이 평생 블레셋에 괴롭힘을 당했다고 배웠습니다만 천주교로 개종한후 이 질문에 대해 교회에선 꽤나 진지한 답변을 주더군요.\ 당시 가나안 지역 민족들은 대체로 전쟁시 피점령지 원주민을 한명도 남겨놓지 않고 학살해서 자신들이 믿는 신의 우월성을 입증하려 하는게 보통이었고 실제로는 예리코성은 이스라엘이 들어기기 200년도 전에 멸망해서 폐허로 남았다는게 고고학적으로 밝혀져 그런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고 단지 당시 중동 사람들 사고방식이 가미된 에피소드라 문자 그대로 믿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더군요.
성경무오류설을 맹신한 나머지 반인륜적인 사실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사실 모든 개신교 문제의 근본이 아닌가 싶네요. 가톨릭으로 옮기려고 작정하고 예비자 교리반에 있을때 교리를 가르치시던 수녀님 입에서 '창조신화' 란 말을 들었을 때 쇼크를 먹었습니다. 제가 대학 때 청년 지도 전도사가 창조론을 신화라고 가르쳤다가 청년들을 의식화 시킨다고 해고된 전도사가 기억나서요.
종교란 결국 더 인간세상을 좋게 하기 위한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대와 상황에 맞게 여러 종교가 펼쳐져 왔으나 본질적인 부분은 결국 우리의 정신과 마음의 훈련을 위한 것이죠.
기독교의 가르침 또한 불교의 가르침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신앙은 그 가르침을 따르기 위한 원동력이 되어 나를 변화시키는 힘이 되어야하지
상대에 대한 폭력이 되서는 안되죠.
그러기에 지금 하신 말씀들은 실제 (최소한 대한민국에서, 그리고 해외 교민사회의 교회에서) 행해지는 개신교의 교리나 그곳에서 주장하는 진리가 아닙니다. 이미 스스로의 종교를 만드신거죠. 다만 유대교와 천주교나 이슬람이나 개신교등 아브라함의 종교와 뿌리가 같을 뿐 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기독교에서 토마스 복음서의 114개 구절만 가르쳐도 좋을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위경취급을 받지만요. 그 나머지의 구신약 내용들은 우리가 어려서 배웠던 삼국유사정도로만 가르치고요.
일단 진화론을 받아들인다면 필연적으로 나오는 결론 중 하나는
인간을 비롯해 생물, 무생물 등 만물은 그냥 서로 변화해가는 과정에 있는 것일 뿐,
고정된 경계가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모두 몇 가지 되지 않는 원소를 돌려쓰며 이루어져 있고
그게 나름의 환경에서 최적화되고 안정화되는 과정에서
어떤 것은 돌맹이가 되고 어떤 것은 배추가 되고 어떤 것은 인간이 되고,
그리고 이것도 최후의 결과물이 아니라 지금도 환경에 적응하며
목적없이 계획없이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 거지요.
인간이 인간이 되기 전에는 어류나 유인원 등 다른 종을 거쳐왔을 것이고,
진화해오다가 그 이전 종이라고도 인간이라고도 하기 어려운 단계도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인간이지만, 앞으로 시간이 흐르면
'이것도 인간이라고 할 수 있나?' 싶은 종으로 진화해갈 것이고
어느 시점엔 정말 더 이상은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완전히 다른 종으로 바뀌어 가겠지요.
어쩌면 지금의 인간이 존재하는 동시에 인간에서 분화한 다른 종이 공존할 수도 있을 것이고
인간이 수백 수천 가지의 종으로 분화할 수도 있을 거구요.
하지만 야훼 신화는 인간과 나머지를 전혀 다른 존재로 취급합니다.
돌맹이도 원숭이도 그냥 배경일 뿐, 성경은 인간과 신의 관계만을 언급합니다.
인간을 다른 동물과는 별도로 창조했고, 원죄를 지어 이후 역사라는 것이 생기게 된 것도 인간 때문이고,
원죄로 이어진 그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아들을 등판시켰고, 이후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도 인간입니다.
진화론을 받아들인다면 이런 야훼 신화의 설정과 이어질 수가 없는 거 아닐까요?
진화론에서는 나름의 진화 경로를 겪고 있는 다른 생물과 인간을 뚝 떼놓고 취급할 이유가 전혀 없잖아요.
예수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만 구원하고 호모 사피엔스는 구원하지 않는 것인가?
앞으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나타난다면 걔들은 천국이나 지옥에 갈까 안 갈까?
'자 지금부터가 인간의 시작이고, 얘네 둘이 아담과 이브야'라고 신이 정의했다면,
그럼 걔네 둘의 아빠 엄마는, 다른 종의 사촌들은 야훼에게 관심 밖인 걸까요?
이런 식의 질문에 어떤 대답을 갖고 있는 걸까요.
유신진화론자라는 사람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진화론은 받아들이지만
신이 진화라는 방법을 사용해 인간을 창조한 것이라고 합니다.
(진화가 자연선택처럼 보이도록 신이 의도한 것이라는 말은
신이 화석을 만들어서 지층에 끼워넣었다는 말보다 덜 억지스러운 걸까요?)
신을 끼얹지 않아도 진화론은 전혀 문제가 없는데, 그냥 우리도 끼워달라는 꼴밖에 안 되어 보입니다.
유신진화론을 받아들이는 기독교인이라는 건 신, 인간, 신과 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일까요.
좀 더 나아가서 보자면, 성서비평을 받아들이는 기독교인이라는 건 또 어떤 존재일까 싶기도 합니다.
근본주의자들이 그렇게 경전의 일점일획도 변개할 수 없다며 글자에 집착하는 게,
저 경전은 전지전능한 신이 내려주신 완벽한 진리라는 설정이니 하나라도 무너지면 모두가 무너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난 일이천년간 무수히 알려진 경전의 모순을 변명한다고 신학자들이 머리를 싸매왔지요.
성서비평의 기본적인 논리 중 하나가 이 경전은 역사서도 과학서도 아닌 문학서이고,
여기에는 문학적 표현과 은유, 상징들이 들어있다는 것이지요.
여타 문학작품도 나름의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듯 경전도 신에 대한 진실을 드러내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는 것인데요.
하지만 그 경전에 사실과 은유와 상징이 섞여 있다면
과연 그 중 어떤 게 사실이고 어떤 게 상징인지 누가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도 누구는 6일 창조설을 문자대로 믿고 누구는 그건 진화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하며
서로 꼴통이니 마귀니 싸우기도 하는 거지요.
같은 종교 안에서도 뭐가 사실이고 은유냐에 대해 얘기가 다 다른데,
야훼가 존재한다는 것, 그 신이 만물을 창조하고 인간과 역사를 주관한다는 것 등도 은유나 상징이 아니라고 할 근거도 없죠.
결국 성서비평의 관점에서라면 이 경전은 교훈을 주고자 하는 옛날 얘기라는 점에서 다른 신화와 특별히 다를 게 없는 게 됩니다.
그런 관점에서의 신을 숭배한다는 건 과연 어떤 것일지 감이 잘 안 잡힙니다. 교양과 특별히 다른 점이 뭘지 라든가...
우주론적으로 볼 때도, 어쩌면 인간을 포함한 지구의 생명활동은 이상현상에 불과하다는 얘기도 있던데, 그 설명할 수 없는 이상현상의 당사자들이 어떻게든 멘붕에 빠지는 건 당연하다고 봅니다. 천재가 아닌 평범한 인간이,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것 이상을 꿈꾸는 한 계속 보편적 형태로서의 종교활동은 일어날 거라고 봅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성과 합리위에 +알파인 신념이나 개인적인 확신을 얻기 위해 종교활동을 하는 개인을 확실히 인식한다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봅니다. 그걸 에둘러 변명하거나,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과학이 발전해도 '오늘 검은고양이를 봤으니 재수가 없겠네' '첫 손님이 생리하는 여자니 오늘은 망쳤다'는 사람들은 여전히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사실 사람을 제일 객체화시키는건 어찌 보면 의학입니다. 지금 한의학에서도 흔적이 남아 있지만 예전 의학이 어떻게 있었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죠. 하지만 지금 시대에 종교가 의학 가지고 시비 걸었다가는 그냥 털립니다.
어찌 보면 심리학이야말로 사람을 가장 객관화시키는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프로이트 가지고 시비 거는 목사를 본적이 없습니다. 사견이지만 아마 기독교 관련학과의 밥줄중 하나라서가 아닐까도 싶네요. (음대와 더불어서요)
공산주의 까는것도 웃기죠... 유물론 가지고 하루에도 열두번씩 저주를 내리는데, 실제 우리가 접하는 유물주의의 극한은 현대 자본주의입니다.
남은건 만만한 진화론 등 자연과학입니다. 이것도 웃긴게 이 진화론인게 찰스다윈이 시초가 아니거든요.. 이미 그 전에 화석발굴로 인해 과학자들 사이에서 진화는 꽤 신빙성 있는 가설이었습니다. 문제는 대체 어떻게 그 과정이 나오는지였죠. 당장 교과서에 나온 라마르크의 용불용설 역시 진화론이었으니깐요. 그런데 뜬금없이 다윈부터 깐다..? 그냥 이 아저씨가 인격자니깐 가만히 있던겁니다. 개인적으로 리처드도킨스의 등장을 환영합니다. 자연과학쪽 사람들 특징이 밖에서 아무리 뭐라 한들 택도 아니다 싶으면 내 연구 아니니 신경도 안쓰거든요. 그나마 나이좀 들면 대중과학에 신경좀 쓴다면서 하지만 이미 그때는 사람좋은 할아버지 다 됐고요. 이러니 종교쪽에서 툭하면 건드리고 유사과학이 판치고 그러는 듯 보여요.
혹시 이러한 사고를 만들도록 도와주신 책이나 자료 추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공이 꽤 되시네요.
혹시 '과학과 신학의 대화' 회원이신지요? ㅋㅋㅋ
위의 댓글들만 봐도 현재 기독교가 어떻게 포지셔닝되어 있는지 그려지네요. 안타깝습니다.
합리적인 기독교란 형용모순일까요. 제 스스로 합리적인 기독교를 지향하지만, 쉽지 않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제가 생각했던 신앙과 많이 닮아서
집중하면서 읽었습니다.
신앙도 여러가지 모양의 신앙이 있는데.. 같은 모양을 보니 너무 기쁘네요.
기독교인이 성인의 삶의 행적을 따르는 이유는 천국에 가기 위함이 아닙니까?
과학적 방법론으로 해당 존재의 입증이 가능하고, 재현이 가능한가요?
이에 대한 단 하나의 예외가 있다면, 성경이 주장하는 세계관을 부정하고 성인 예수의 삶 자체와 철학만을 본받는 경우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사람을 현재 대중적인 관점에서 기독교인이라는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을까요?
과학은 합리적이고 종교는비합리적이란 의견에서 이미 그 근본에 이원론이 자리잡고 있다고 봅니다.
현대사회에서는 과학은 절대적인 가치로 여기고 인문학은 상대적인 가치로 여기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서 종교는 사람들의 인식에서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이며 사적영역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강하지요 반면에포스트모던의 분위기 속에서 모든 가치를 상대화시키는게 요즘 사람들의 트랜드인데 이상하게도 과학만이 절대적으로 합리적인 가치라고 여기는 모순이 있습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보자면 과학에도 상대적이고 기만적이고 종교적인 측면이 강하게 있지 않나요? 저는 과학철학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과학 스스로도 과학의 가치를 절대화시키는 일에 대해 경계하지 않나요? 사람의 합리성에는 한계가 있으니까요(사실 인간을 합리적으로 보는 시각 역시 이미 부서진지 오래인 전근대적인 시각이긴합니다)
종교의 겸손에 대해 이야기하셨는데 사실 과학역시 겸손의 영역이 아닌가 생각해요~
아무튼 과학사를 보면 비합리적인 과오가 있고 종교의 영역도 합리적인 철학의 영역이 있습니다 ㅎㅎ 너무 단정짓고 논의를 시작하시는데 제가 보기에는 사고의 틀 자체가 오류가 있는거 같아서 토한번 달아봤습니다 ㅎㅎ 과학에 대해 무지한 사람이 쓴 덧글이니 한번 읽고 가볍게 무시하시면 되겠습니다 ㅎㅎ
왜냐하면 요즘의 분위기가 포스트모던이 아니이기 때문이지요.
현대 사회에서 인문학의 위상이 떨어진 건 거창한 이유를 댈 거 없이 그냥 '과학에 비해 개연성 있는 설명을 해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개연성 있는 설명이라는 건 '인간의 생명 및 안위'와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병에 걸리면 병원을 찾아갈 건가요, 아니면 인문학자를 찾아갈 건가요?
정당한 방법으로는 도저히 과학을 이겨먹을 수가 없으니 들고 온게 바둑판 뒤집기(포스트 모더니즘)입니다.
바둑판을 뒤엎어 버리고는 '승부는 무효다' 이러는 겁니다.
한 동안은 혹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실체가 까발려지고 나서는 유행이 죽어버렸죠.
포스트모던이 끝났다기 보다는 여전히 전쟁중이지 않을까 싶어요 ㅎㅎ 글쓴분처럼 과학은 사실이다 종교는 비합리적이다는 가정이 일종의 이원론적인 틀안에서 결론을 정해놓은 논리라거 생각해요
사람이 비합리적이다라는 가정에 동의하면 과학이 절대적으로 합리적이다는 사실도 주장할수 없지요~ 마치 사진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찍는것처럼 보여도 사진작가의 의도와 프레임이 반영되어 있는것처럼요
과학에 절대적인 가치(사실로서의 가치)를 부여하는 오류는 쓰신 글에도 나타나 있어요 병에 걸리면 당연히 병원을 갑니다(그렇다고 병이 100%완치 된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삶은 생명유지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누군가 왜 살아야하는지 물어본다면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누군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어떤 지식에 호소하겠습니까? 과학자에게 이런걸 물아보진 않잖아요?
과학이 설명할수 없고 해명할 수 없는 영역이 분명히 있지요 그리고 과학에도 언제나 오류의 가능성이 존재하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을 사실이다 혹은 절대적인 합리성이다는 사고의 틀을 갖는다면 사실/ 가치의 이원론에 빠질뿐입니다.
과학이 합리적인 이유는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오류가 발견되었을 때 그 오류를 수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문학도 오류가 발견되면 오류를 수정하죠. 그래서 인문학도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종교의 경전이 오류를 인정하고 오류를 수정하고 개선하는 학문인가요?
종교인들이 더 물러설 자리가 없다고 한탄하기 이전에 자기가 서있는 땅이 사실은 과학과 매우 다른 방법으로 움직이는 세계라는 걸 스스로 깨닫는다면, 과학적인 방법으로 과학자의 설명에 반기를 드는 행동은 안하리라고 봅니다. 자기의 툴이 아닌 것을 가지고 과학의 영역에 뛰어든 것 자체가 미스죠. 이를테면, 어떻게 원숭이가 사람이 되느냐같은 질문을 하는 대신 종교의 언어로 인간의 존엄함을 설파해야 한다고 봅니다. 원숭이보다 좀 더 나은 것만이 인간의 전부가 아니죠. 인간의 생각, 그 비이성, 복잡한 감정, 거룩한 것을 추구하는 마음, 신심 그 여러가지 그 자체가 바로 인간의 경이로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기존의 종교적 도그마로는 이 난관을 돌파하기 힘들거라고 봅니다. 만화책을 가지고도 경전을 만들만한 대담함이 있어야 지금의 꽉 막힌 종교적 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전통적 종교는 후계자없이 금세기안으로 종말을 맞이할지도 모릅니다. 이십일세기의 문명에 맞는 새로운 형태의 신앙이 등장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사실 신학이나 교회사를 조금이라도 공부하셨다면 신학 역시 오류를 수정해온 역사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다른 종교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ㅎㅎ
여기 계신 분들이 과학 지식은 상당하신거 같은데 신학이나 인문학에 대해서는 위치를 잘 못 설정하신거 같아서 한번 글을 써봤습니다.
'경전의 오류'를 말씀하셨는데, 이거는 해석학의 영역에서 대화를 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텍스트를 해석함에 있어서 텍스트를 인정하고 시작하는 해석이 있는가 하면, 텍스트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시작하는 해석이 있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과학은 자연이라는 텍스트를 인정하고 거기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두가지 도구가 필요한데, 하나는 자연의 질서가 실재로 존재한다는 가정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는 인식론입니다. 먼저 전자는 댓글에서 어떤 분도 얘기하셨지만 과학의 분야에서 다루지 않습니다(그런데 진화론을 종교처럼 신봉하는 분들은 이 영역을 가려고 하지요 그러는 순간 과학을 종교처럼 다루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기독교신학이 이러한 가정에 토대를 제공해줍니다. 또 인식론과 관련해서도 과학은 우리가 사실을 바르게 인식할 수 있다는 가정을 필요로합니다. 이 역시 과학에서 다루지 않지만 기독교신학에서 이러한 가정에 토대를 제공해줍니다. 그래서 글쓴분도 과학철학을 언급하셨지만, 과학을 시작하기 위해서 과학철학이 필요하지요~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이 사실을 그냥 믿고 시작합니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텍스트 곧 경전이 과학에서 말하는 사실의 영역입니다. 질서가 존재한다. 우리가 그 질서를 인식할 수 있다라는 인식론과 더불어서 시작하지요. 아마 제가 이렇게 짧게 설명을 드리면 결국 믿음이라는 불합리성에 의존하는게 아니냐? 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제가 인식론을 이야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과학도 결국 자연 질서가 있다, 내가 그것을 어느 정도 인식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합니다(그런데 왜 이것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과학의 관심분야가 아니죠).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 하나님이 경전을 통해 자신을 알리셨다라는 믿음 아래서 위에 두가지가 가능하다고 설명합니다 ㅎㅎ
뉴튼이 사과가 떨어지는 자연 현상보고 물리학 법칙을 알아냈습니다. 수백년을 뉴턴의 법칙으로 과학이 발전하다가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발표하면서 뉴턴의 법칙이 수정됩니다.
하지만 신을 보고 사도가 적은 경전을 해석하는 부분은 많지만 경전 자체를 수정하지는 않지 않나요?
만약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발표해도 뉴턴의 법칙이 수정되지 않는다면 과학도 합리적이지 않겠죠.
실제로 신을 보고 경전을 업데이트 하는것이라면 신학도 합리적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만든 경전을 보고 신을 연구하면서 경전은 업데이트 할 수 없기 때문에 종교가 과학보다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네요.
엄밀하게 말하자면, '자연의 질서가 실제로 존재하고, 인간이 그걸 관찰 할 수 있다'라는 건
수학에서 '1+1=2'라는 공리를 세우고 출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리입니다.
종교적인 절대진리에 대한 신앙이 아니구요.
(말씀하신 야훼신화 류의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라는 믿음에서는 야훼 또한 '상위의 신이 나 야훼를 창조한 게 아니다. 나는 그냥 스스로 존재한다. 시계공? 훗... '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겠지만, 그것 역시 믿음일 뿐이겠지요)
맞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과학도 각자의 분야에서 믿고 싶은 것을 믿는거라고 인정하시는지도 묻고 싶습니다 ㅎㅎ
과학도 과학 고유의 영역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과학이 하나의 과학주의 세계관으로서 전 영역을 지배하려 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위에 글쓴분이 올리신 사진에도 과학이 사실의 영역을 다룬다고 하셨는데, 이런게 바로 이원화된 세계관입니다. 사실이 지배하는 공적 영역은 과학이 지배한다고 여기고, 믿음이나 의견은 상대적인 가치가 지배하는 사적영역으로 치부해버리지요.
그런데 이러한 세계관 아래서 인간은 '기계적인 인간'으로 전락해버립니다. 그래서 이 것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낭만주의나 포스트모던주의로 가는거구요. 포스트모던주의자들은 '상대화'와 '거대담론'이라는 무기로 과학의 영역까지 침범하려 하는거구요 ㅎㅎ 과학이 만들어 내는 세계관이나 인문학이 만들어내는 세계관은 결코 가만히 있지 않고 서로 싸웁니다.
말씀하신 각자의 영역이 있다고 하는 말은 이런 상황에서 서로 싸우지 말고 각자의 영역에서 지내자는 하나의 캐치프라이즈 같은거구요 ㅎㅎ 그런데 이러한 구조속에서 사람은 파편화될뿐만 아니라 일종의 모순을 안고 살아갑니다. 하부구조(공적영역)는 과학주의가 지배하고 상부구조(사적영역)는 다른 의견이 지배한다고 여기는데 이 둘이 충돌하는 영역이 있으니까요. 그냥 살면 사실 이런 모순을 안고 살아갈텐데, 좀 더 진지한 분들은 이런 모순을 못참고 서로를 침범해서 영역에 머무르지 않는 완전한 세계관을 구축하려합니다. 친화와 창조의 싸움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지 종교와 과학의 대화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리진'을 점령하는 세계관이 우위를 점할 수 있거든요 그런면에서 저는 창조과학은 거부하지만(사실 창조과학은 기독교계 내에서도 소수의견입니다 ㅎㅎ 세대주의라는 학파에서 주로 주장하는 이론이지요. 우리나라에서는 이상하게 교회의 대표적인 이론으로 자리잡았는데, 사실 세대주의가 한국교회에 많은 영향을 미친 여파가 있습니다) 진화론이 만들어내는 세계관 역시 거부합니다(진화 자체는 잘 모릅니다).
그리고 종교가 종말을 맞을 거 같다고 하셨는데, 사실 그러한 주장은 이미 모더니즘이 지배하는 시기에 차고 넘쳤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현대에 오면서 종교가 더 번성하고 있지요(교회는 힘듭니다 ㅠ). 그리고 과학도 종교의 영역을 침범하여 종교가 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하지요 ㅎㅎ 왜 이럴수 밖에 없는지는 쓰신 댓글에 나타나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과학주의는 끔찍하거든요 ㅎㅎ 그런데 인간의 존엄성은 사실의 영역입니까? 의견의 영역입니까?
여기 있는 대부분의 댓글과 의견들이 모더니즘의 시각에 머물러 있는거 같아서 안타갑습니다. 그리고 이런 논쟁에 의견을 교환할 정도면 신학(내지는 종교)과 과학의 대화에 관심이 있는 분들일텐데 너무 기본적인 수준에서 조차 종교를 이해하지 못하는 시각이 많아서 아쉽구요 ㅎㅎ 사실 조화시키려는 심도있는 논의가 굉장히 많은데 아쉽네요(저는 이분야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더 설명을 못해서 안타갑구요 ㅠ).
덧붙이자면 본글의 의견은 기독교신학을 허무는 논리 중에 하나입니다 ㅎㅎ 예를 들어 구약을 신화로 봐야한다고 하는데, 구약을 인정하지 않으면 신약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신약은 구약의 주석과 같은 책이니까요. 게다가 창조를 허물면 기독교신학 전체가 무너집니다~ 신학안에도 체계라는게 있기 때문입니다. 나름대로 이 주제와 관련해서 고민도 많으시고 조화를 시키시고 싶으신거 같은데 안타갑습니다. 이 분양에 더 좋은 책들을 참고해보시면 어떨가 합니다.
그 뉴튼이 독실한 신자이고, 아인슈타인은 제가 알기로 무신론자인거로 알고 있습니다.
뉴튼의 경우 신이 만들어낸 법칙을 발견하는 일을 자신의 소명으로 삼고 과학을 발전시켰습니다.
'신이 세상을 질서 있게 창조하였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법칙이 있다'를 가정으로 삼고 과학적 방법론을 발전시킨거지요
종교가 과학보다 합리적이라고 말하는게 아니라 서로 조화를 이루는 부분이 있다는 거지요 ㅎㅎ 서구사회에서 과학이 발전할 수 있도록 도운 학문이 신학이라고 하면 너무 거부감이 심하실까요? ㅎㅎ (너무 갈릴레오만 생각하지 마시고 과학사를 보더라도 신학자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합니다 ㅎㅎ)
과학도 철학이 뒷받침해야 가능하듯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완전히 합리성만 필요하지 않고 가설을 받아들이는 믿음이 필요한 영역이 있지 않은가요? 그래서 과학은 합리성, 종교는 감정이나 의견의 영역으로 나누는건 너무 피상적인 수준에서 논의를 시작하는거라고 생각해요 ㅎㅎ
'경전 업데이트', '인간이 만든 경전'에 대해서는 사실 본글을 쓰신 분은 다 인정하시는 것 같은데, 저는 인정하지 않는 신학흐름이긴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제가 짧게 쓰기에는 실력이 미천하여, 그저 인식론 차원에서 생각해보시자고 썼습니다 ㅎㅎ
1+1=2 가 가능하려면 자연에 질서가 존재한다는 가정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인식하려는 인식론적 철학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포스트모던 철학에서는 그러한 절대적 질서를 부정하자고 주장하지요(거대담론). 그래서 각자 인식하는대로의 세상이 있다라고 인정하자고 말하지요. 이런 경우에는 1+1=2가 자명한 진리 라고 말하는 것도 부정됩니다.
그래서 저도 포스트모던 철학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면 1+1=2 가 자명한 공리라고 말하는게 이미 모더니즘 아래서의 인식이고 지금은 그런 경계가 많이 허물어졌습니다. 그러니까 1+1=2를 인정하려면 인식론이라는 철학이 뒷받침 되야 한다는거에요 ㅎㅎ
종교는 그런 영역에서 철학을 제공해주는 원동력이 되구요 ㅎㅎ 그래서 기독교신학을 토대로 과학을 하시는 과학자들도 종종 있는거로 압니다~
괄호안에서 말씀하신 바는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가네요 ㅎ 신이 있다고 인정하는게 믿음의 영역이라면 이 세상에 우연히 질서가 존재한다고 인정하는 것도 믿음의 영역이 아닐까요? ㅎㅎ
그리고, 종교의 형식, 제례, 기타 고정된 것들에 대해서 고수하려는 마음을 좀 더 가볍게 하지 않으면 종교도 외면받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카톨릭이 왜 자꾸 전향적인 모습을 보입니까. 시류를 일고 자기들의 포지션을 조금씩 앞으로 전진시킬 수 있는 포용성 때문이라고 봅니다. 제가 종교가 멸종할 것 같다고 한 얘기는 전통?을 고수하는 여러가지 종교들이 그대로 살아남을 수 없다고 한 것일 뿐... 신흥종교나, 자기 안을 벗어날 준비가 된 종교는 지속될거라고 믿습니다.
아, 그리고 인간의 존엄이 사실의 영역이냐구요? 전 인간을 기본적으로 동물과 같은데 조금 복잡하다고 보는 입장에서 인간이 존엄하면, 자연계에 어떤 것도 존엄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봅니다. 생명의 경이로움, 단순히 먹고 싸는 단순한 상태에서 벗어나 꼴리는대로 불가해한 생각과 행동을 하는 그 모든 일이 경이롭다는거죠. 그것 자체가 종교라고 봅니다. 경이로움을 느끼는 그 상태....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은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핵심 아닙니까. 만물의 영장이라면서 신께서 특별히 인간에게만 허락한 '신을 닮은' 그 상태 말입니다. 인간이 존엄하다고 생각한 단초는 기독교가 제공한 겁니다.
너무나 흔한 바둑판 뒤집기를 시도하고 계셔서 솔직히 말하면 조금 지루하군요.
바둑판 뒤집기(포스트 모더니즘)의 문제점은 뒤집어진 바둑판에서는 본인들조차도 바둑을 두지 못하게 된다는 데에 있죠.
그런데 너무나도 많은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이, 본인들이 바둑판을 뒤엎어놓고 그 위에서 다시 새로 바둑을 두려고 하더라고요.
'모든 철학 체계는 거기서 거기'라는 논리를 들이대며 과학의 권위를 깎아내려 놓고는 본인들의 주장에는 다시 새롭게 권위를 부여하려고 한다는 거죠.
본인들의 논리에 따르면 포스트 모더니즘조차도 '거기서 거기인 설명'의 하나일 뿐인데, 사람들이 그걸 귀담아 들어야할 이유가 뭘까요?
수틀리면 또 다시 바둑판을 뒤엎으려들텐데요.
제가 이런 분야 공부는 미천해서 지루하셨다면 어쩔 수 없네요 ㅎㅎ
저도 포스트 모더니즘을 반대합니다. 그런데 제가 말하고 싶은 거는 모더니즘의 세계관도 포스트 모더니즘과의 전쟁중에 있다는 거에요 ㅎㅎ (왜 제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셨는지 모르겠네요 ㅠ) 포스트모더니즘이 기여한 바가 있다면 인간이 절대적으로 객관하 하는 일이 불가능 하다는 것을 천명한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부분에는 분명히 일리가 있구요~
끝에 말씀하신 바가 포스트모더니즘의 모순임을 동감합니다. 지금은 포스트모더니즘이 끝났다고 하시는데
제가 이해하기로는 현대화는 이원론의 세계관에서 하부구조(공적영역)는 과학주의가 상부구조(사적영역)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서 서로 지배적인 세계관이 되기 위해 싸우고 있는 중이지요
이런 구조를 이해할 때, 과학과 종교의 대화도 가능하리라 봅니다.
저는 과학과 신학이 얼마든지 조화를 이룬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은 사실, 종교는 의견이라는 이원론에 갇히지만 않으면요 ㅎㅎ
그렇다면 의견이 저랑 크게 다르지는 않아요 ㅎ 저는 과학주의 세계관을 반대하는거지 과학 방법론을 부정하는게 아니거든요 ㅎㅎ
생명에서 경이로움을 느끼는 일이 종교라고 하신 말씀에서 이미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일에 있어서 종교의 영역을 인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과학주의 세계관에서 생명의 경이로움 존엄성을 인정할 수 있는지가 궁금합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밑에 어떤 분이 인용하신 리처드 도킨스같은 사람이 만들어내는 세상에서 인간은 기계이상이 될수가 없는거로 알거든요.
만약 과학주의 세계관이 인간이나 생명의 존엄성을 인정할 수 없는 세계관이라면 과학주의 세계관과 종교라는 세계관을 함께 가지고 사는 일은 일종의 모순을 내포합니다. 본글에도 섣불리 조화를 이루다가 그런 모순이 발생하는거구요
말씀하신대로 인간의 존엄성은 기독교신학에서 중요한 인간론입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서 기독교신학이 창조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말씀하신것과 같이 자연도 존엄성을 가집니다. 창조가 선하다고 보기 때문이지요~
제가 사실의 영역이냐고 질문했던 거는 과학주의 세계관에서 생명의 존엄성을 말할 수 있는지 궁금해서였습니다 ㅎ
또하나, 불가나 도가에서 말하는 대로 우리는 공'의 상태에 닿기 위해 애를 쓰지만, 영원히 공'이 되지 못합니다. 육체라는 한계를 안고 세상을 인식하는 한 합리이든 감정이든, 그 모든 것이 지극히 인간적이죠. 그 인간성이 바로 종교가 탐구하는 신성과 크게 배치되지 않는다고 보기도 하구요. 도킨스의 전투적인 자세가 많은 종교인들로부터 공분을 불러일으킨 바 있지만, 우리가 기계가 되지 않는 한 도킨스의 주장처럼 종교가 일소된 세계는 존재할 수가 없다고 봅니다. 과학이 과도하게 전투적인 태도로 종교를 대할 필요도 없고, 어쨌건 종교가 현대인들에게 다가가 세상의 밀알이 되고 같이 호흡해 나가기 위해서는 지금의 틀로는 힘들다고 보는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저랑 입장은 다르실지 몰라도 생각자체는 거의 같습니다. ㅎㅎ 저는 정말 과학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과학에도 믿음이 영역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오히려 기독교 세계관 아래서 과학이 더 잘 기능할 수 있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하면 너무 나이브한가요? 실제로 인간의 모든 층위를 설명하기에는 과학주의는 한계가 있습니다. 자연의 질서를 발견할 수는 있어도 의미를 발견하는 일에는 과학적 방법론이 한계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의미를 추구하는 동물이라는 점에서 불가피하게 과학자들도 의미의 영역에 띄어둘수 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과학을 종교의 영역으로 바꾸려합니다. 프란시스 쉐퍼라는 학자는 이런 현상을 '신앙으로의 도약'이라고 부릅니다. 과학주의가 완전한(통합적인) 세계관이 되려고 할 때, 자신들이 그토록 비웃는 종교적 어법을 사용하는 일에 대해 비판하지요
말씀하신 바, 종교가 변혁해야 한다는 점은 백분 공감합니다. 저도 클리앙 와서 보면 종교는 감정적, 비이성적, 비합리의 영역이라고 단정짓고 말씀하시는 분들 보면서 많이 놀랍니다. 그동안 봐온 종교의 모습이 그러하니까 그렇게 생각하시는거라고 보며 반성도 합니다(그러나 철저하게 믿음을 감정적으로만 받아들이는 것도 왜곡된 종교의 모습이라고 항변하고 싶어요 ㅠ). 종교, 특히 교회가 감정의 언어에만 호소하고, 비합리적인 설명이나 정당성을 외칠 때 말씀하신 것처럼 현대화 될수록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들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교회사에서도 이미 경험한 일이기도 하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통 기독교신학에는 여전히 극복할 수 있는 지적 유산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부족하지만 더 심도 있는 대화가 가능하도록 공부를 틈틈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반적으로 인식이란 뭔가를 기반으로 하기는 하죠.
근데 차이는 그 기반을 공리로 받아들이느냐 신앙으로 믿느냐 하는 차이일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과학은 몇 가지 공리를 기초로 쌓아올린 방법론이고 설명체계입니다.
그것은 절대 진리도 아니고, 종교적인 신앙도 아닙니다.
사실 이 세상이 꿈 속이 아니랄 보장도 없고, 매트릭스 속이 아니라고, 예수나 이만희가 신이 아니라고 부정할 근거도 없습니다.
우리는 태양이 아니라 지구가 고정되어 있고 나머지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좌표계를 만들어 사용할 수도 있지요. 문제는 너무 복잡한 설명이라는 것일 뿐.
마찬가지로, 우리는 야훼가 존재한다는 공리에서 모든 것을 설명해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매트릭스 속이라는 공리, 통속의 뇌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공리를 기반으로 모든 걸 설명할 수도 있죠.
근데, 과학적인 설명체계에 비해서는 설명이 더 어려워지고 애드혹이 늘어나고 하는 등의 단점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도 말이 안되고 서로간에 의사소통이 안되는 등의 문제점이 있을 거구요)
아마 야훼신화 류의 신앙과 과학의 차이점이라면, 그 공리가 공리인 것을 인정하느냐, 그걸 절대진리라고 무조건 믿어라 믿어라 하느냐의 차이가 아닐까 합니다.
과학의 공리도 그걸 절대진리로 믿는다면 그것도 일종의 종교가 되겠지요. (아마 말씀하시는 과학주의라는 게 이런 쪽이겠지요. “이 세상에 우연히 질서가 존재한다고 인정하는 것도 믿음의 영역이 아닐까요”라고 하신 것도 마찬가지, 그걸 공리로 받아들이느냐, 신앙으로 받아들이느냐의 차이일 겁니다)
네 공리라는 개념을 제가 잘 모르겠어서 잘 이해가 안가기는 합니다. 저는 사상계에서 공리, 혹은 자명한 사실이라는 개념이 사라졌다는 전제에서 생각을 하고 말하는데 과학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공리의 개념을 말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일단은 여러 댓글들을 보니까 과학주의와 과학적 방법론을 구별해야 겠다는 생각이 드네요(무슨 아직도 갈릴레오 수준에서 이런 대화를 할 수 있다고 보는 분들이 있다니 너무합니다. 과학적 방법론도 종교개혁 이후에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는데 ㅠ)~ 제가 과학적 방법론을 부정하는거는 아니고 그 혜택을 누리고 있으니까요 ㅎ
그런데 말씀하신 것처럼 '공리를 인정하는 것'과, '무조건 믿어라'를 대비시키는 것에는 반대합니다. '과학의 공리도 그걸 절대진리로 믿는다면 종교가 되겠지요'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공리라는 개념도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없고 의심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실제로 과학혁명을 보면 이전에는 타당했던 가설들이 어느 시점에서는 뒤집어지기도 하구요~
그러니 과학에도 믿음이라는 인식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무언가를 판단할 때, 기준이 되는 지점을 잡아야지 사고가 가능한것처럼요~ 다윈이 이런 류의 말을 했다고 하지요, '나는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되었다고 본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는 나의 뇌는 원숭이로부터 왔는데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까'(정확한 워딩은 이게 아닌데 생각나는데로 씁니다 ㅠ). 철학에서도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가 있듯이 무언가 인식하기 위해서는 기준이 되는 절대적 영역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포스트모던으로 오면서 이런 절대적 기준이 되는 영역을 흔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신학에서는 과학을 하는데 필요한 모든 절대적 영역을 인정합니다. '세상에는 질서가 있고, 인간은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전제는 하나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설명) 그러니까 왠만한 현대 사조보다 사실 기독교 신앙이 과학과 가장 가까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믿음을 어떤 불합리적 결단이라고 인식하는 면에서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인식의 기반은 과학에서 말하는 가설이나 믿음에서 시작하니까요(칸트가 이런 작업을 절묘하게 한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래서 과학은 사실의 영역이고 종교는 감정이나 의견의 영역이라는 이원론에 반대하는 겁니다. 실재에는 이 두가지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과학 스스로가 절대적인 사실이나 진리라고 주장하지 않듯이) 이런 이원론은 상황을 단순화 시켜서 오히려 분명히 드러나는 모순에 눈감게 하는 비합리적인 태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1=2, 점이란 넓이가 없는 위치이다, 실험과 관찰을 통해 나온 것은 사실일 것이다, 같은 거요.
이런 건 그냥 이렇게 합의하고 얘기를 해보자는 거지, 이것이 진리이니 받아들여야 한다는 게 아닙니다.
절대적이지도 않고, 신뢰할 필요도 없고, 의심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냥 합의일 뿐이니까요. 그러니 1+1=3이라는 공리를 기초로 수학을 쌓아갈 수도 있고, 위에서 얘기한대로 야훼가 있다는 공리, 이 세상이 매트릭스라는 공리 하에서 세계를 설명할 수도 있을 겁니다. 문제는 그게 실제로 유용한가, 충분히 실용적이냐 등인 거지, 이게 진리인가가 아닙니다.
(신앙에서 얘기하는) 믿음은 그게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이고,
공리는 그냥 그렇다고 치고 논의를 진행해보자 라는 것입니다.
사유와 인식의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실제 내용은 다르죠.
그러니 ‘과학도 믿음에서 출발한다’라기보다는 ‘과학은 공리에서 출발한다’라는 쪽이 더 맞는 서술이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자가 ‘관찰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으니 너는 사탄’이라는 식으로 얘기하지는 않잖아요.
저로서는 인간에게는 공리로도 충분하다고 보는 것이고, 야훼신화 류의 신앙에서 말하는 절대진리 같은 건 어차피 증명될 수도, 합의될 수도, 서로 공유될 수도 없는 것이니 이런 대화에서 내놓을만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야훼가 존재한다느니 이만희가 신이라느니 이 세상은 통속의 뇌라느니 지옥의 석가모니 음성을 들었다느니... 이런 것들을 다 믿음이고 진리라며 나열하고 꺼내놓으면 그거야말로 포스트모던...--;;
그러면 공리는 가정이라는 말이네요 ㅎㅎ
그렇다면 종교에서는 신이 있고 신이 세상을 만들었다는게 공리입니다(굳이 증명하려 하지 않는 다는 측면에서 그렇습니다 ㅎㅎ)
과학도 나름의 체계에서 공리를 점검하듯이 신학도 나름의 체계에서 믿음을 점검합니다.
믿음도 나름의 합리적 선택이라고 볼 수 있어요. 전통 신학에서는 믿음의 3대 요소를 지식, 동의. 신뢰라고 설명합니다(믿음을 감정의 영역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자유주의 신학의 여파가 큽니다. 합리주의로 대표되는 모더니즘의 물결에 밀려서 후퇴한 결과지요).
아무런 합리적인 고민 없이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도박이지요
성경도 그러한 믿음에 대해 경고합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도 가만히 앉아서 계산해보고 결정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신학자 역시 신학체계를 받아들이지 않으니 너는 사탄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비인간적인 종교를 변호하고 싶은 마음은 없네요(물론 그런 종교만 봐 오셨다면 그렇게 말하셔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ㅎㅎ)
단지 제가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는 종교의 영역이 비합리적이라는 주장에 딴지를 걸고 싶어서에요 ㅎㅎ
어느 세계관이나 학문이 현상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느가의 문제도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요
말씀하신 공리만으로 인생에서 발생하는 의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습니다.
왜 살아야 하는가, 내가 왜 도덕을 지켜야 하는가 같은 문제 등등이요 ㅎㅎ 이 세계관의 통합이 해결하지 못한 오래된 과제입니다. 과학주의적 세계관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칸트가 그냥 적당히 덮어두자는 식으로 넘어갔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 뒤로 한치의 발전도 없었구요(물론 제가 공부가 짧아서 요즘에는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지 정확히 모릅니다 ㅎㅎ).
종교가 아니라 과학이 현상을 설명하는 일에 유용하다고 하시는 것 같은데, 제가 말씀드린 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 결국 기계론적 인간론으로 귀결될 뿐입니다. 거기에 도덕과 사랑, 선, 감정 등은 그저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할 뿐이구요 ㅎㅎ 하기사 얼마전 유발 하라리의 책을 보니 인간이 발전하게 된 계기가 '허구'를 다룰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더군요~ 그런데 사실 이런 세계관은 오히려 현상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누구도 자신을 기계로 여기며 살지 않고, 누구도 자신의 사랑이나 감정, 도덕관념을 허구로 받아들이지 않으니까요
계속 이원론에 대해 말씀드리지만, 공적영역(하부구조, 사실, 논리, 공공) 사적영역(상부구조, 의견, 감정, 개인, 도덕)을 통합할 수 없는 세계관은 세계를 설명하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말씀하신 공리에 따라서 자연의 질서 뿐만 아니라 인간의 도덕과 감정 모두를 통합하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칸트도 이 한계를 알기 때문에 적당히 이 모순을 덮어 두었던 거구요).
반증불가능이요? 그런 건 종교적 뿌리를 버리지도 못하고 과학적 사실을 부정하지도 못하는 글쓴분과 같은 애매한 입장의 분께 좋은 도피처 같은 표현이겠지만, 글쓴분 수준의 사고가 가능하신 분이라면, 적어도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격화된 신과 성경의 거의 모든 내용이 합리와 과학의 틀 안에서 얼마든지 반증된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아마 잘 아시니까 상징과 은유라는 지푸라기라도 잡으시려는 것일텐데, 그런 건 기독교의 믿음 체계를 근본부터 부정하는 말이라는 사실은 제쳐두고, 산타 할아버지 동화에서 루돌프와 나는 썰매, 전세계 어린이에게 하룻밤만에 선물을 나눠주는 뚱보 할아버지라는 상징을 제외하면 뭐가 남지요? 자식에게 줄 선물을 몰래 양말에 넣는 부모가 남겠죠. 판타지는 사라지지만 훨씬 소중하고 애틋한 현실이 보이지 않습니까?
말씀하셨듯이,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 비합리적입니다. 근데 비합리적인 것과 비합리를 추구하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종교는 비합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절대 지속될 수 없어요. 저는 글쓴분이 애매한 양다리에서 벗어나서 결국 조만간 합리와 이성의 세계에 완전히 정착하시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산타 할아버지 예시를 드셔서, 저도 같은 비유로 말씀드려 봅니다.
저는 '크리스마스 선물'의 원인이 부모님이라는 걸 압니다.
산타 할아버지라는 존재가 물질세계에서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고요.
그래서 저는 산타를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증명불가능한 것으로 상정하고는 거기로 도피해버린 것이죠.
그런데 저는 제가 찾은 그 장소가 만족스럽습니다.
roria 님이 보시기엔 답답하고 멍청한 행동이겠지만 그게 제 선택입니다.
부모님을 버리고 산타를 선택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산타라는 개념을 동원한 게 아니라
이제는 그냥 산타라는 개념을 상정하고 산다고 할까요. 그게 삶의 행동양식이 돼버린 거죠.
포장해서 말하면 그런게 종교인으로서의 삶이라고 생각힙니다.
다만 제가 본문 글에서 말하고 싶었던건, 부모님(과학적 원인)을 무시해버리는 태도가 과거부터 이어오는 기독교의 문제이고 그런 태도를 고쳐나가자는 이야기였습니다.
덕분에 많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결론적으론 또다시 자기합리화로 도망쳐버린 셈이지만, roria 님을 설득하기 위해 이런 글을 쓴 것이 아니라 그저 저라는 사람이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 몇 자 적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리츠멜키어님이 현재 어떤 위치에 계시고 어떤 고민의 과정을 거치셨을지 짐작이 갑니다. 추측이지만 비교적 어린 시절부터 종교 커뮤니티에 속해 계시지 않았을까 짐작합니다. 아마도 그 안의 좋은 사람들과, 좋은 덕목들을 배우고 성장해왔겠죠.(사족이지만, 저는 신과 종교가 완전한 허구라고 생각하는 것과 별개로, 종교 커뮤니티에는 일반 사회적 평균을 상회하는 많은 긍정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후에 논리와 합리적 사고 체계가 형성되고, 그간 종교적으로 배워온 많은 이야기에 오류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고민에 빠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 고민의 결과가 본문과 댓글로 말씀하신 현재 위치일 것이고요.
현재 그 위치가 만족스럽다고 하셨는데, 저는 그 만족이 과연 얼마나 갈지 의심스럽습니다. 명백히 배치되는 두 가지 길에 양다리를 걸치고 앞으로 걷다보면 언제가는 가랑이가 찢어집니다. 아마 모리츠멜키어님이 정말로 조금만 더 멍청했다면, 차라리 이런 고민도 없이 한쪽에서 만족한 삶을 살 수도 있었겠지만, 이미 다른 길을 알게 된 이상 두 가지 길의 양립은 불가능합니다.
합목적적으로 살게 되어 있는 인간에게 목적이 사라진다는 건 분명 두려운 일입니다. 종교인에겐 신이 삶의 목적이겠지요. 서울에서 부산으로 국토대장정을 시작하여 그 과정에서 훌륭한 동료와 함께 고난을 극복하고 자기 수양의 길을 걸었는데, 부산이라는 도시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걸 알게되면 삶이 통째로 흔들릴 겁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왜 걸었는가. 이 길의 의미는 무엇인가. 부산이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면서도 언젠가 걷다보면 부산에 도달할 수 있다는, 스스로도 믿지 않는 희망과 그동안 걷던 타성으로 계속 걷겠습니까?
과학의 세계에서 인간의 삶이란 잠시 세상에 흔적만 남기다 의미 없이 사라지는 허무한 것처럼 보입니다. 매미나 돼지가 그렇듯이요.
반대로 말하면 짧은 시간일지언정 그 시간동안 채울 수 있는 텅빈 도화지가 내 앞에 놓여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 무엇을 그려야 하고, 다 그린 뒤에 상으로 무엇을 주겠다고 말해주는 신은 없습니다. 대신 무엇을 그리고 그 그림을 통해 어떤 기쁨을 느낄지는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동안 누군가의 지시대로 삶의 그림을 그리던 사람들에겐 갑자기 주어진 무한대의 자유가, 거꾸로 무한대의 책임처럼 무겁고 두렵게 느껴지지만, 결국 다른 선택지는 없다는 걸 깨달아야 합니다.
글 전체를 긍정하기 어렵네요.
정작 우종학 교수님이 이 글에 어떻게 반응하실지 궁금하네요;;
과학으로 대답할수있는 신학자로 평가받는 알리스터 맥그라스 추천합니다.
우리만 옳다
너만 틀렸다를 버리면 됩니다
진화론은 이론일 뿐 법칙이 아닙니다.
만약 과학적 사실이면 법칙이 맞고 ~~론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개인적 견해로 사람들이 진화론에 더 열광하는 것은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해하지 못하면 사람들은 열광하지 않거든요..
양자역학의 고양이만 봐도 ‘살아 있지만 죽은 고양이’를 완전히 이해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아인슈타인도 처음에는 부정했으니까요.
하지만 이 양자역학은 현대 공학에 어마어마한 역할을 합니다.
이제는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고요..
그런 면에서 신화 같고 소설 같은 창조론이나 성경의 구약도 ‘현대 과학’으로 증명되지 안는다고 그것을 믿으면 비합리적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상당히 편협한 생각인거 같습니다.
p.s.참고로 생명의 기원을 진화론으로 설명하기엔 거기도 비과학적인 것이 너무 많습니다. 생물이 존제하는데 진화한다는 것은 관찰 가능하므로 부정할수 없는 사실이지만 최초 생명 기원은 아직 진화론도 풀지 못한 숙제 입니다.
1. 진화는 사실이고 이 진화가 어떻게 일어나는 지를 설명하는 과학 이론이 진화론입니다.
2. 진화론은 생명이 존재한다는 걸 전제로 성립하는 설명이기 때문에 최초 생명의 기원과는 본질적으로는 관련이 없습니다.
https://futurism.com/hypothesis-theory-or-law
성경이 현대과학으로 증명되지 않는다고 부정하는 것은 편협하다? 같은 논리로, 유니콘과 단군 할아버지와 재림 예수 이만희와 허경영과 로또 예측 업체를 옹호하시겠습니까?
아래는 리처드 도킨스의 [지상 최대의 축제] 중 한 구절인데 참고하시라고 남겨둡니다.
"과학자들로 하여금 ‘진화는 사실’이라고 추론하게 하는 증거들은, 어느 시대의 어느 법정에서 어떤 범죄의 유죄 확정에 동원된 목격자 증언들보다 더 풍부하고, 더 결정적이고, 더 확실하다. 합리적인 의혹을 넘어서는 증명이냐고? 합리적인 의혹? 세상에 이보다 더 심한 과소평가는 또 없을 것이다."
진화가 사실이 아니리라고 믿는 것보다는 현 대통령이 문재인이라는 건 우리의 집단환각이리라고 믿는 게 더 쉬울 걸요.
그거 환타지로 매도한다고 없어지는 사실도 아니구요.
진화론이 환타지라는 근거가 겨우 교과서에도 없다는건가요 수많은 논문과 과학적 증명은 무시하구요..
그거 밝혀낸 과학자들 덕분에 우리가 코로나를 극복해나가는거구요...
기독교가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엔 전염병의 정체도 모르고 역병으로 다 죽어나갔지만요..
그것도 하나님의 뜻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제 글이 공격적으로 느껴지신다면 똑같이 진화론에 대한 허무맹랑한 공격은 하지 말아주세요. 어디에서건요.
삶이 윤택해지기 위한 보조역할에 종교가 있다
맹신하는 사람은 종교가 곧 삶이라고 하더라
위의 이야기처럼 맹신하는 사람은 보편적인 것을 인정할줄 모른다는 것
맹신하는 사람은 종교라는 정신질환자인것일뿐 더도 덜도 아닌 것이다
그런데 꼭 묻고 싶습니다. 감리교인으로서 화자께서는
1.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믿으십니까?
2. 구약을 다 신화로 보더라도 우리의 지상 명령이 땅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임을 믿으십니까?
신앙과 과학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더 신뢰할수록 창조의 원리와 세상의 과학이 더 잘 조화될 것입니다. “그날이 오면 희미하게 보던 것들이 명확히 보일 테니까요”
1. '구원'을 어떻게 정의 하시는지요.
2. 사도행전에 나오는 '땅끝'은 어디라 생각하시는지요.
1. 천국이 어디냐. 구원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하겠지요. 하지만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예수를 믿음으로 믿는 자들과 안 믿는 자들이 사후에는 구분이 되게 되어 있고, 그것이 예수를 믿는 믿음에서 기인한다는 것은 모든 개신교의 원리입니다. 천국이 어떤 모습일지 지금은 모르겠지요.
2. 땅끝 역시 정말 세계이다. 그 당시 땅끝은 그리스까지에 불과하다 등 의견이 많지만 그것은 이야기의 핵심이 아닙니다. 핵심은 우리가 예수를 전파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을 믿어 달라는 말씀이 아니라 개신교의 교리가 그렇다는 뚯입니다. 이걸 믿지 못하면 개신교도가 아닌 것이라는 말이지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영역이지요. 따라서 그 믿음에 동조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사회에 나쁜 짓을 하지 않는한 그것은 사실이 아니니 믿지 말아라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죠.
원글쓴분께 드린 말이지만, '과학과 신앙의 양립'은 그 가능성 이전에 순서 자체가 잘못 된 겁니다. 양립하겠다고 결론을 내려놓고 그 양립할 방법을 찾으니 그게 무슨 과학적 사고입니까. 물리학자라시니 잘 아시겠지요. 물 위를 걷는 것에 대한 믿음을 버리기는 싫고, 물리법칙을 부정하지는 못하겠으니 그 둘을 어거지로 양립할 방법을 찾아보자고 애쓰는 그게 무슨 과학적 사고입니까. 밥을 많이 먹고 살 빼려고 하지 마시고, 체중조절을 하려면 식단부터 바꾸셔야죠.
질문에 대한 답은 유아 세례를 받았던 제가 입교식을 할 때에 여러 증인들 앞에서 믿음으로 대답했으며,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제 스스로의 의지로 고백한 것들입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저를 판단하는 것은 아르미안 님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고 생각합니다. 다소 무례한 답변인 점에 사과드립니다.
아르미안님이 하신 질문도 어떤 면에서는 무조건적인 명제가 아닙니다.
어떠한 한 성향의 교파들이 중요시 여기는 카피라고 할 수 있죠
이 두가지 질문만으로 그리스도인을 판단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습니다.
아 물론 저는 저 두가지 질문을 긍정합니다.
하지만 두가지 질문을 내놓으며 개신교인으로 판단하려 한 점에 대해 우려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저 두개의 질문조차 한국 내의 신학교를 위시한 교파에 따라 논쟁할 수 있는 여지가 많습니다.
일단 글쓴이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방향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하고 동의합니다. 창조과학은 과학이 아니고 현시대의 얄팍한 지식으로 끼워맞추기에 급급한 창조설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성경의 저자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작성하였다 하더라도 실제 하나님이 아닌 사람인 이상 오류가 발생할 수 있음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으므로 성경무오설에 근거한 이른바 창조과학은 오류 투성이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심지어 성경무오설의 토대가 되는 시카고 성명서에서도 비유는 비유로, 과학과 역사는 별개로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더해 성경무오설에서 말하는 오류가 없는 원본은 현존하지도 않죠.
다만 종교가 비합리적이라는 부분은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합리적이지 않다면 내려놓고 종교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셔야하지 않을까요? 현대의 과학으로는, 어쩌면 인류가 지구에서 사라지는(예시적 표현입니다.) 미래시대의 과학으로도 과학적 타당성을 말할 수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이 있음을 인정하고 믿고 따르는 마음과 행동 자체가 합리적이지 않은 것이라면 그 그냥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한 무속신앙과도 다를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의 수 많은 오류를 인정하신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책을 붙들고 신을 믿는 이유가 뭔가요? 518 민주화 운동을 부정하고 북한 간첩의 소행이었다고 주장하는 무리들은 아무리 수 많은 증거와 증언을 가지고 와서 그들 주장의 허구성을 증명해도 여전히 자기들의 '믿음'을 버리지 않습니다. 핵심 주장들이 명명백백한 과학적 사실들로 얼마든지 반박되어 누더기가 된 책을 붙들고 '그래도 여전히 진리가 여기 있을 거야'라는 생각을 가지는 게 과연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태도인가요?
다만, 글 내용이 대한민국의 감리교도라고는 생각하기도 힘들 정도의 성향이 느껴지는 글로 보입니다. 다른 보수적인 신도들에게 안 좋게 보일 것 같은데... 예장총공(대한예수교장로회한국총공회)같은 데서 이 글을 봤다간 사탄이 쓴 글이라고 고함을 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