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17회 양산하프마라톤 대회에 참석했습니다.
해냈다는 벅참이 채 가시기 전에 일기 같은 대회 후기를 남겨보고자 합니다.
스스로 머릿속에 튀어나오는 언어들을 여과없이 옮겨 경어를 쓰지 못한 점을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런생 처음 20킬로를 넘게 달려보기에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무릎이 아픈 것을 핑계로 마일리지가 모자랐는데, 완주를 할 수 있을까?
걷지 않고 뛰어서만 완주 할 수 있을까? 두 시간 안에 들어올 수 있을까? 무리를 하다가 다쳐서 더 오래 훈련을 쉬어야 하는 건 아닐까?
걱정을 더 이어 나가기도 전에 카운트 다운은 시작됐고, 워치의 스타트 버튼은 눌러졌다.
영상의 날씨는 달리기 최적인 온도다. 땀이 날듯 나지 않고 나더라도 금방 근육들만 식혀주는 정도이다
양산거리는 마라톤을 위해 깨끗하게 비워져 있다. 귀한 손님이 된 듯 레드 카펫마냥 깔끔하게 정돈된 차도를 시원하게 내딛어 본다. 우려했던 통증은 없다. 오히려 호흡도 몸도 가볍게 느껴진다.
우르르 쏟아지는 주자들은 어느새 앞서고, 뒤서며 본인들의 페이스를 찾아가는 듯 하다.
나도 나의 페이스를 찾아야 한다.
2시간! 2시간은 5:41으로 달리면 된다. 5:41를 달려본 적이 없는 나에겐 쉽지 않았다. 저기 2:00 페이스 메이커가 보인다.
부지런히 달려 3km 지점쯤에서 2:00 페이스 메이커 뒤에 붙어 따라갈 수 있었다. 기분 내키는 대로 페이스가 오락가락하는 P형 러너인 나에게 페이스 조절을 강제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페메를 따라 달리는 건 뭔가 치트키를 쓰는 것 같았다.
칼같이 지켜지는 페메 페이스에 놀랐다. 페이스 메이커는 정말 아무나 하는게 아니구나 그 노련함에 탄복했다.
"내리막길이라 보폭을 줄여서 다리에 데미지를 줄이겠습니다."
"(7km 지점 통과하며)코스의 1/3지점을 통과했습니다."
"다같이 화이팅하겠습니다."
"지금과 같은 페이스로 돌면 2시간안에 들어오는데 25초의 여유가 있습니다." 단순히 페이스를 알려주는 정도에서 뒤에 따라 뛰는 러너들을 안내하는 안내자, 코치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한 무리의 사람들이 페이스 메이커의 노란 풍선을 따라 뛰고 있다.
6000명이 가까운 사람들, 그 중 200 풍선을 따르는 무리 15~20명은 마치 같은 해 수능을 앞두고 있는 고3 동창생과 같은 얼굴로 서로를 응원하고 있다.
서로가 주고 받는 응원들과 유체역학적 저항의 감소로 연습때와는 다른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앞뒤 양옆 사람들에게서 멀어지지 않는 것만을 당면 목표로 삼았다.
그러고 나니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풍경도 눈에 들어오고 주변에 어느 나이대의 사람들이 무얼 입고 무얼 신고 달리는 지 볼 수 있었다.
모두 각자의 페이스로 주로에 몸을 내맡기는 이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무슨 음악을 듣고 있을까? 저분은 앞으로 더 빨리 뛸 계획일까? 저분은 목표 시간대가 어떻게 될까? 저렇게 입으면 안더울까?
쓸데없는 오기와 경쟁심이 발동한다. 저 커플보다는 더 빨리 들어가보자, 이 마라톤클럽 아저씨는 포스가 장난이 아니네? 그래도 내가 남잔데 저 여성 러너보다는 처지고 싶지 않다.
생각보다 수월하다는 생각을 했다. 심박수의 상승속도도 어느정도 완만해진 듯, 무슨 자신감이었을까. 페메의 안정적인 드라이브를 버리고 사춘기 소년처럼 일탈을 하고 싶어졌다.
반환점을 돌고부터는 좀 더 기록을 단축하고 싶다는 욕심을 실현해보기로 한다.
의지하던 페이스 메이커와 작별을 하고 도망치듯 그룹을 이탈했다.
다시 만나지 말자. 다시 만난다면 나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을테니까, 그 상태만은 면하고 싶다.
남은 주로를 혼자 운영하려니 잡생각들이 마구 튀어나왔다. 200 그룹에서 갈 때는 뒤쳐지지 않게 맞추어 달리는 것만 몰두했다면 지금은 어디에 에너지를 어떻게 써야할 지 모르는 망아지처럼 뛰어다녔다.
5:40, 5:20, 5:30 페이스가 들락거리면서 내달린다. 앞에 달리는 사람을 페이스 메이커 삼아 조금씩 간격을 줄이는게 순간의 목표였지만 쉽지 않다
어떤 이는 점차 빨라지고, 어떤 이는 점차 느려지니, 그 간격이라는 게 너무나 상대적이었다.
어쩌면 마라톤 대회는 시작하면서부터 끝날 때까지 간격과의 싸움이다.
탕하고 시작을 알리는 총성이 들리면, 출발지점과 나, 그리고 도착지점사이의 간격을 쉬지 않고 바꿔 나가는 게임,
페이스 메이커와 나의 간격을 유지하다가 결국엔 저기 분홍 싱글렛 입은 멋진 형아나 티파니 알파플라이 신은 누나와의 간격을 좁히려는 게임
그러다가 결국 멀어지는 걸 보고 만 있어야 하는 게임
17km가 지나고나니 이제는 주로에 주자들이 일렬로 주욱 펼쳐진 다. 앞뒤로 순서만 바뀌고, 서로의 간격만 조정 될 뿐, 초반처럼 우르르 달리는 장관은 볼 수 없다.
모두 각자의 발걸음과 호흡에만 집중한다. 점점 나의 페이스가 늦어지고 심박수가 180이 넘은 것을 확인하자 내가 이걸 왜 하고 있는 지 멍하게 된다. 그만하고 싶다. 그래도 계속 해야 한다. 계속 하고 싶다.
불현듯 이렇게 계속 달릴 수 있다는 자체에 감사함이 울컥 밀려왔다. 신이 있다면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싶었다.
심박수는 내가 멈추지 않는 이상 계속 올라갈 것이다. 아직 3km 정도 남았는데, 멍한 느낌이 언제까지 갈지 가는 데 까지 가보기로 한다.
주변에 화이팅 하고 응원해주는 이들에게 더 크게 "화이팅"하고 외친다. 응원은 받는 사람보다 응원하는 사람에게 더 효과가 좋은 걸까?
화이팅하고 크게 외치는 만큼 더 큰 기운을 얻는다. 한명씩 나를 제치고 앞서는 이들에게 진심으로 존경과 응원을 담아 화이팅을 외친다.
이제 승부욕은 없다. 아니 승부는 다른 사람과 하는 게 아니었다. 달리고자 하는 나와 쉬고자 하는 내가 하는 승부였다.
20km가 넘고 내 페이스는 540를 넘어섰다. 이제는 페이스도 의미가 없다. 1km만 더 뛰면 된다. 1km만, 막판 스퍼트를 하려해도 되지 않았다.
처음에 신나게 달려온 길을 이제는 온힘을 다해 뛰고 있다. 우습고 재밌다. 운동장 내부로 들어온다.
운동장에 많은 사람들이 둘러싸 응원를 하고 있었지만 나에겐 오로지 골인 지점만이 시야에 들어온다. 드디어 골인.
워치에 종료 버튼을 누른다. 이제 끝났구나. 2시간 안에 들어왔구나.
대회는 다른 사람들도 나와 똑같이 미쳐있구나를 확인하는 즐거운 과정이었다.
러너가 아닌 다른 사람에겐 나는 조금 이상한 사람일지 모른다.
주말 아침 나홀로 트레드밀 위에 2시간 동안 땀을 뻘뻘 흘리며 심각하게 운동하는 사람,
추운날 점심을 안먹고 반팔로 회사 곁을 달리는 사람,
대회를 마치고 다리를 절뚝이며 자신을 학대하는 사람
대회에서 다른 러너들과 달리는 경험은 뭐랄까. 혼자만의 레이스에서 고독함을 느꼈다면, 대회에서 수많은 이들과 달리면서 동질감과 동지애를 느꼈다
집에 도착하니 내전근, 햄스트링, 둔근이 원망 섞인 통증을 뱉어낸다.
아이고 아이고 통증이 있는 부위에 마사지를 하면서 대회영상을 찍어올린 유튜브 채널들을 살펴본다.
맥주를 삼키면서, 내년 밀양 하프 마라톤을 접수한다.




아래보니...1시간 50분 기록도 있으시네요. 빠르시네요~ㅎㅎ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제 마음을 언제 보셨나 봅니다 ~
정성스러운 후기 덕에 제가 달리는 기분으로 스크롤 내려 갔네요.
저도 겨우 2번의 대회에 참가했지만, 홀로 달리거나, 여러명이 달리더라도 확실히 대회아는 다른거 같습니다.
대회는 정말 축제와 같고 아드레날린이 엄청나게 뿜어져 나오더군요. 이 글에서도 그런게 느껴집니다.
내년에는 춘천 마라톤 전 까지는 특별히 대회 참가 계획이 없었는데,
이 글을 읽어 내려가다보니 가까운 대회를 찾아서 접수하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듭니다.
내년 봄에 처음으로 하프 대회 나갈 예정인데 정성스런 경험담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계속 즐런하시길 바랍니다 ^^d
고된만큼 값진 기록이네요~^^
막 달리고 싶습니다.
물론 뛰다보면 후회가 밀려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