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만에 가까운 흥행 영화에 리뷰를 쓰는 거니까, 내용소개나 영화내적인 요소의 이야기는 생략하고요. 그저 개봉 당시 관객의 평가는 둘로 나뉘었을까에 대한 얘기를 써볼까 합니다.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파묘>에 기대한 지점이 애초에 달랐던 거에요. 참고로 이 글에서는 역사와 정치적인 부분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없으니 참고 부탁드려요.
오컬트 영화는 보통 두 갈래로 나뉩니다. 장르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고요. 서사적인 부분에서의 분류입니다. 미지의 존재에 의해서 오는 공포를 주요 테마로 하면서, "불가항적 위력이 주인공을 휩쓰는 결말" 혹은 "그것을 이겨내는 결말" 입니다. 최근 작들 중에는, 전자는 <유전> 혹은 <곡성> 같은 작품을 예로 들 수 있겠고, 후자는 <더 넌>이나 <사바하> 같은 작품을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물론 둘 다 깔끔하게 이겨내는 결말은 아닙니다만... ㅎ
<파묘>에 실망했던 분들은 바로 전자의 예처럼 '불가항적 위력이 주인공들을 휩쓰는 결말' 을 기대했던 것으로 추측합니다. 영화 전반부는 분명히 그런 흐름이었거든요. 화림은 무당이고 상덕 역시 풍수지관일 뿐이지, 소위 말하는 퇴마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악마 혹은 유령을 처단하는 이야기도 아니었고 그럴 수 있는지에 대한 관객의 기대나 확신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장재현 감독의 전작들 <검은 사제들>,<사바하> 가 결국은 악마를 처단하는 결말이기도 했고, 이번 <파묘> 역시 등장인물 이름이나 차 번호판등 핵심적인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에 각본이나 연출 상의 실수가 아닙니다. 이 영화 역시 퇴마 혹은 엑소시즘 등의 결말이 될 가능성이 컸습니다. 초반 개봉 당시의 관객이나 평론가들의 아쉬웠던 평가는, 제작자나 감독의 실수로 말미암은게 아닌, 그저 그들의 스스로 기대에 대한 실망인셈이죠. 하지만 관객들의 내용이 예상과 달라서 실망한 건 아닙니다. 내용과 상관없이 관객에 기대했던 건 따로 있다고 생각하든요.
<서울의 봄> 흥행을 예로 들어보죠. 정확히 현실의 누군가를 가리키지만 실제로는 영화상의 가상인물이기도 한 '전두광'의 비열한 발언과 행동을 보면서, 대중들은 현실적인 무력함 때문에 표출하지 못하는 분노를 대신 표출할 수 있는 쾌감을 느꼈던 것입니다. 관객이 기대한 바는 아니지만,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현실에서의 거대 정치권력이나 갑질대기업 또는 어떤 식으로든 만들어진 그들만의 리그에 당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막상 그 분노를 표출하지 못했던 것은 '분노 챌린지' 등을 통해 표출할 기회를 얻었던 것이고, 영화가 주는 색다른 카타르시스가 되었던 셈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서울의 봄>에 한정되는 부분이고, <파묘>를 통해서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한국사회의 정치, 경제적 사회상황에 대한 이율배반적인 기대가 있었으리라 추측합니다. 악마에게 당하는 등장인물들이 스크린에서 구현되는 것을 통해 충족하는 카타르시스 인셈이죠. 관객들이 마조히스트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파묘>가 '오컬트 영화'의 일부 팬들에게는, 극 중의 인물들이 미지의 공포에 당하는 못습을 통한 무력함에 대한 공감과 파괴적인 욕망을 동시에 얻고자하는 기대가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마치 러브크래프트의 코즈믹호러나 앞서 말한 아리 에스터 감독의 <유전>같은 작품에서 느끼는 쾌감같은 것이죠. 그러다보니 그것을 기대했던 평론가나 장르영화 팬들은 후반부의 흐름과 특히 결과적으로는 '퇴마를 하는 과정'이 시각적 청각적으로 느끼고 상상시키게 하는 것이 아닌, 대사로서 설명하는 것이 심드렁해졌을 거라 추측합니다. 더욱 압도적이지만 알 수 없는 무언가에 공격당하는 공포의 쾌감이 감소했거든요.
<파묘>는 그런 장르영화의 기대를 저버리고, 여러분들이 이미 다른 평론가 영상이나 분석글에서 보셨듯이 영화의 스토리를 영화의 구조에 녹이는 방식, 즉 '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었다' 라는 대사처럼 영화가 3막 이후 끊긴 것 같은 형태를 취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이게 흥행에 주효한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앞선 장르영화 팬들의 기대감이나 후기는 일반 관객들의 구매 선택에 큰 영향을 주는 바이럴마케팅효과를 얻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고 싶은 쉽게 말해, '티켓값 하는 재밌는 영화'를 보고 싶은 일반 관객들의 욕구도 있거든요. 앞서 말했듯, '퇴마를 하는 과정'이 오로지 은유와 기존 러닝타임에서 그려진 힌트로만 알아챌 수 있는 연출이었다면, 관객들은 그 장면을 쉽게 이해하지 못해 결말에 대한 명쾌한 느낌을 얻지 못했을 겁니다. 어려운 영화는 흥행하기 어렵다는 걸 전작을 통해 감독은 깨달았을 겁니다. 게다가 <파묘>는 그런 관객들의 욕구를 채우고도 넘칠 중량감이 여러모로 넘치는 작품입니다. 연출, 연기, 두 편인듯한 영화의 분위기와 주제, 디테일한 설정과 숨겨진 메시지들이 일반 관객들을 넘어 장르 영화 팬들에게도 볼륨감 넘치는 감상을 주죠.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계속 심각하기만 한 것도 아닙니다. 적절한 시점에서 관객의 입장으로서 영화의 호흡을 가다듬는 유해진 배우가 분한 장의사 역할도 있고, 주인공이 죽어가는 과정에서 되뇌이는 딸에 대한 이야기등은 한 없이 무거워진 분위기를 환기시키기도 하며 관객들을 즐겁게 하죠. 계속 비교하는 <곡성>의어느 평론가의 평을 인용해 설명해본다면 이렇습니다. <곡성>은 관객에게 목줄을 걸고 멱살을 끌고 가는 작품이었다면, <파묘>는 마치 관객에게 리드줄을 당겼다 폈다 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나라에서 영화흥행은 혼자 관람하든 누군가와 같이 보든 간에, 늘 소위 '티켓값이 아깝지 않은' 영화였었습니다. 그게 거창한 역사의 이야기이든, 화려한 판타지가 담긴 볼거리든, 스펙터클한 액션이나 자지러지는 코미디든, 평범한 일상의 내밀한 감정을 다루는 것이든 간에 말이죠. 스티븐 스필버그는 다른 인터뷰에서 '영화가 큰 화면에서 표현되는 것이 티비와의 차이점이고, 티비에서는 스토리텔링이나 시각적 효과가 충분히 전달되지 않을 수 있다' 라고 한 적이 있는데, 이는 관객들의 감정이나 욕구를 어떻게 충족시키느냐가 결국 영화의 본질적 매력이라는 것을 짚어준 것입니다. 장르영화에도 본질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영화의 본질에 충실하는 영화가 매력적이고 흥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외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최근 <파묘>와 동시 개봉되었던 어떤 영화가 티켓값을 페이백 하는 마케팅을 한 적이 있는데요. 그냥 공짜로 영화를 보는 것에 불과할 뿐, 실제로 값을 치르고 나서도 만족하는 경우라고 보기 어렵고, 영화의 본질적인 매력에 충실했느냐 라고 말한다면 장르를 떠나서 충실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렇게 만들어진 관객동원수라는 것은 그 영화에 환호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소수인지를 증명하는 자살골같은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한 마디로 장황한 글을 요약하자면, 결국 <파묘>는 개봉 당시 관객의 평가가 둘로 나뉘었던 건 장르영화에서 기대했던 지점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지만, 대중영화로서는 다양한 관객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영화내적으로 볼륨감있는 내용들이 흥행의 주효원인이었던 것이라 추측합니다.
더 뭉뚱그려 줄이자면, '티켓값이 아깝지 않은 재밌는 영화' 라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