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필하모니 내한공연 후기
"내가 곧 법이야."
내가 법이니라~. 이런 것도 아니고 발랄 떨리는 "내가 곧 법이야"
수많은 라흐마니노프, 차이콥스키, 림스키 콜사코프 연주를 들어왔지만 모스크바 필하모니 처럼 당당하고 뚜렷한 색깔을 띈 연주도 드물 것입니다.
그도 그럴것이 라흐마니노프, 차이콥스키, 림스키 콜사코프 레파토리는 러시아 본연의 색이니 당연한거죠.
악보는 음높이, 음길이, 셈여림, 빠르기 등이 표기 되어있지만 악보에 모든것을 담아낼 수 없는 아니 담아내지 않아도 그 민족 사람들이라면 당연이 그렇게 연주하는 고유의 호흡(내지는 Tempo Rubato)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서 오묘한 3박자 비엔나 왈츠가 있죠.)
이는 작곡가가 일일히 표기하지 않아도 응당 그렇게 연주할 것을 알기에 악보는 최소, 최적의 표기만 남겨지고 나머지는 사실 (우리나라 명창의 구음이 전해지듯) 연주자의 제자의 제자의 제자의 제자의 제자....... 를 통해 녹아 내려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장황한 설명을 하는가하면
오늘 연주회를 듣고 얄미우면서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순수 러시아산 음악을 '맛' 보았기 때문입니다. ㅠㅠ
오늘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을 연주한 안드레이 가브릴로프 (사실 전 오늘 처음 접한 연주자였습니다)는 마치 "내가 라흐마니노프다"라고 말하는 듯 자연스럽고도 진퉁 같은 러시아 냄새를 뿡잉뿌잉 뿜어댔습니다. 악보에는 없는 그러나 꼭 찾아내어 그렇게 연주해야하는 바로 그 냄새 그 맛 그 느낌... 그걸 아련하게도 아니라 찌인하게 그냥 드러내 보였습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여지껏 수영복으로 가린 미녀만 보다가 그냥 전라의 모습으로 천연덕스럽게 스윽 옆에 다가와 찐한 키스로 제 입술을 훔친다음 홀연히 사라진 듯한...
당혹감과 동시에 빠져들수 밖에 없는 마법같은 연주였습니다.
연주 내내 그 큰 거미같은 손으로 섬세한 거미줄을 수놓듯 청중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땡겼다~ 놨다를 하더군요.
한편 지휘를 맡은 유리 시모노프는
세계 몇 안되는 내공의 지휘자였습니다. 카라얀도 그렇고 이사람도 그렇고...
다른 지휘자와 어떻게 다르냐 하면 쉽게 말해 별로 휘젓지 않습니다.
제가 합창석 지휘자와 바로 마주보는 위치에 앉아서 지휘자를 면밀히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패드에 오늘 연주될 악보를 다운받아 스코어를 넘겨가며 감상하다가 너무 빨라서 대충 포기하면서 지휘자를 유심히 관찰했는데 지휘자 등뒤에서는 안보이는 그만의 표정과 몸짓과 호흡을 함께 할 수 있어서 더욱 좋았습니다.(이젠 합창석 아니면 안앉을래)
대부분의 지휘자들은 연주할때 규칙적인 템포를 항상 지시하도록 꾸준히 휘저으려 하는 편이지만 유리 시모노프는 오케스트라 단원이 인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동작만, 아니 그것도 매우 절제해서 지휘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다른 지휘자들 처럼 움직임이 많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표정과 미세한 몸짓이 지휘가 되버립니다. 카라얀의 카리스마가 바로 그랬죠.
그 작은 체구에 그렇게 풍부한 표현을 모두 담아 러시아산 진퉁 연주를 거침없이 풀어냅니다.
"내가 곧 법이야"
그러면서도 연주 중간 중간 웃음이 터져나올 듯한 익살과 해학이 담긴 표정과 연기 같은 지휘가 연주 내내 보는 즐거움을 더했습니다.
무.서.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사분란한 모스크바 필의 연주였습니다.
현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처럼 유려하면서도 매우 매우 섬세한 톤이었고
금관은 흔히 한번쯤 기대하는 삑살은 고사하고 철두 철미한 정확함과 절도가 느껴졌습니다.
오늘 연주에서 특히나 자주 등장한 클라리넷 솔로는 우수에 젖은 동유럽 색채가 뼈에 파고들 듯 스산하면서도 애절한 느낌을 잘 전해 주었습니다.
철저한 연습과 훈련 없이는 이런 소리가 불가능 한데
이들은 이미 그 경지를 넘어 정작 무대위에서는 내가 연주하면 곧 라흐마니노프니라! 차이콥스키니라! 림스키 콜사코프니라! 라고 선언 하는 듯 했습니다.
우리나라 청중들은 연주자들에게 세계적으로 기립박수에 인색한 것으로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일어서는 것이 뻘쭘해서이기도 하고 남 눈치도 보이고 괜히 오바하기 싫고... 뭐 이러저러한 이유로 박수만 크게 열심히 그 무엇보다 재빨리 치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기립하더군요. 저도 ...
오랜만에 귀를 호강하고
으흠... 저런 경지에 오른 애들은 눈치 안보고 지 맘대로 연주해버리는 구나... 그래도 누가 뭐라 말 못할 것이 러시아산 레파토리니 뭐...
인정 인정 인정...
(에잇 젠장...ㅠㅠ)
이러고 왔습니다.
마치 초등학생이 또박또박 한글자 한글자 읽던 소리만 듣다가
유명 성우가 감정과 연기력 폭발해가며 입체낭독을 하는 "예술"을 듣고 와버렸으니...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다른 연주자의 같은 음악을 듣기가 허탈해 집니다.
자리를 마련해준 친구놈에게 거하게 저녁을 쏴 주고 싶어도 연주가 8시에 시작 11시 다되어 앵콜만 5곡 넘게 했으니...
식당 문이 다 닫혀 24시간하는 새마을 식당에서 뒷고기만 구워먹고 헤어졌습니다.
귀부릅니다.
100% 동감합니다.
완전 감동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