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자라고 어미, 아비는 늙습니다.
언젠가부터, 정확히는 아이들의 자의식이 자라 일상의 거의 모든 순간을 스스로의 뜻대로 하고 싶어 하는 즈음부터, 아이들과 함께 있는 모든 순간이 일종의 ‘힘겨루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좀 미안한 이야깁니다만, 마냥 이쁘고 아기새마냥 따르기만 하던 시기의 아이들이란 사실, 내가 나의 뜻대로 할 수 있는 사물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런 아이들이 자라나 말을 하고, 달리고, 메달리며 하나의 주체가 되고, 자신 앞의 또 다른 주체와 맞서기 시작했다는 것은, 특히 어미와 아비의 입장에서는, 마법과 같은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늙어 가는 두 주체는, 자신의 신체와 내면을 온통 몰두하게 만드는 저 어린 영혼들로부터, 자기들의 존재가 완전히 소멸되는 그 이후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시간, 끝나지 않는 시간을 봄으로써 영원을 예시하는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자라나 성장하는 모든 순간이 어찌 마법과 같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럼에도, 자연에 속한 우리들은 어찌할 수 없는 또 다른 진실 속에 있습니다. 아직은 우위인 어미, 아비의 스러져 가는 힘이, 아직은 열세인 아이들의 자라나는 힘과 매순간 부딪힌다는 것, 그리고 벌써 두 힘이 교차하는 순간이 머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그 끝은 마침내 우리의 패배라는 진실!
오늘 함께 식당에 갔다가 식탁머리에 앉히는 것부터가 대결의 연속이었던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니 초췌해진 아내와 나의 얼굴을 보고 뱉는 넋두리쯤 되겠습니다. 그러고 쓰러져 누우니, 푸르트벵글러의 우아한 슈베르트가 듣고 싶어졌습니다. 지더라도 우아하게 지고 싶어서..
슈베르트 ‘로자문데’ 3막 간주곡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빈 필하모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