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제사라는 게 유학의 정식 풍습도 아니었습니다.
주자가 유학의 도리에 대해 정리할 때 때마침 그의 부모님이 돌아가셨고,
때문에 어떻게 죽은 부모를 도리를 다해 모셔야 하나를 정리하면서
제사라는 게 생깁니다.
사실 공자님은 죽은 사람은 어떻게 모시는 거냐고 누군가 묻자,
나는 산 사람 대한 도리도 모르겠다고 쌩까시며 귀신을 매우 싫어하셨던
지극히 현세적인 분이었죠.
어쨌거나 사대부들에 의해 성리학이 들여오고 통치 이념으로 자리잡으며
제사 사라는 풍습이 생겼는데
밑에 족보 글애서 나왔던 것처럼 양반 중에서도 사대부들만 하는 거라
하는 집이 많지 않았습니다.
세종 때 와서야 긴 통치기간 중 반상의 구분을 명확히 하며,
제사와 상중 기간 등등의 여러 관혼상제에 대한 기준이 나름 자리를 잡긴 합니다만,
사람들이 바로 지키진 않았죠.
그리고 임란 전 까지는 대체로 그 원형을 유지합니다.
따라서, 감히 여자는 참여할 수 없었고,
본질적으로 남자 중심의 남자에 의한 남자만이 참여하는 행사였습니다.
가문에 따라서는 제사를 지낼 때는 바깥채에 모든 여성이 출입금지였을 정도였죠.
하지만 임난 이후 신분제가 출렁이며,
족보가 마구잡이로 퍼지고,
그 결과 자신의 양반이 진짜라는 걸 입증하기 위해
진짜도 제사를 지내고 가짜도 제사를 지내게 되니
너도 나도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게 된겁니다.
더 재밌는 부분은 철저한 남성 중심의 행사였던 제사가
사실상 하는 일 없이 글이나 읽던 양반들이 아닌 일반 사람들에게 퍼지면서
상대적으로 한가한 노동력이었던 여성이 준비하는 행사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시월드의 코어 투 코어가 되고야 말죠.
그라하여 모두 성이 있고, 족보를 가진 오늘날,
한국인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제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동아시아 중에서도 성리학이 가장 오랫동안 대성공한
한반도에만 남아있는 재밌는 풍습이죠.
주자가 유학의 도리에 대해 정리할 때 때마침 그의 부모님이 돌아가셨고,
때문에 어떻게 죽은 부모를 도리를 다해 모셔야 하나를 정리하면서
제사라는 게 생깁니다.
사실 공자님은 죽은 사람은 어떻게 모시는 거냐고 누군가 묻자,
나는 산 사람 대한 도리도 모르겠다고 쌩까시며 귀신을 매우 싫어하셨던
지극히 현세적인 분이었죠.
어쨌거나 사대부들에 의해 성리학이 들여오고 통치 이념으로 자리잡으며
제사 사라는 풍습이 생겼는데
밑에 족보 글애서 나왔던 것처럼 양반 중에서도 사대부들만 하는 거라
하는 집이 많지 않았습니다.
세종 때 와서야 긴 통치기간 중 반상의 구분을 명확히 하며,
제사와 상중 기간 등등의 여러 관혼상제에 대한 기준이 나름 자리를 잡긴 합니다만,
사람들이 바로 지키진 않았죠.
그리고 임란 전 까지는 대체로 그 원형을 유지합니다.
따라서, 감히 여자는 참여할 수 없었고,
본질적으로 남자 중심의 남자에 의한 남자만이 참여하는 행사였습니다.
가문에 따라서는 제사를 지낼 때는 바깥채에 모든 여성이 출입금지였을 정도였죠.
하지만 임난 이후 신분제가 출렁이며,
족보가 마구잡이로 퍼지고,
그 결과 자신의 양반이 진짜라는 걸 입증하기 위해
진짜도 제사를 지내고 가짜도 제사를 지내게 되니
너도 나도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게 된겁니다.
더 재밌는 부분은 철저한 남성 중심의 행사였던 제사가
사실상 하는 일 없이 글이나 읽던 양반들이 아닌 일반 사람들에게 퍼지면서
상대적으로 한가한 노동력이었던 여성이 준비하는 행사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시월드의 코어 투 코어가 되고야 말죠.
그라하여 모두 성이 있고, 족보를 가진 오늘날,
한국인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제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동아시아 중에서도 성리학이 가장 오랫동안 대성공한
한반도에만 남아있는 재밌는 풍습이죠.
당시에는 존재하는지 조차 불분명했던 주나라 은나라 시대를 아주 꿀바르듯이 미화했고요
( 구분은 안되나 아무튼 그 시기에 존재한 국가가 있었다는거는 최근들어 검증되는 중..이고요 )
'천'의 개념도 앞에서 한거 뒤에서 뒤집더군요
해서 저도 결국 어떤 비평가가 썼듯이 " 세일즈 하다보니 상황따라서 말이 바뀐거." 라는걸 알게 되었습니다.
죽은 사람에 대한 제례 도입은 공자님이 한것이 아닙니다.
양인들은 부유할 경우 조부모까지
먹고 살만하면 부모까지였으나
의무는 아니었고,
-그냥 밥그릇 차려놓고 감사 하다고 하는 정도면 됩니다.
양반은 얄짤없는 4대까지였습니다.
그리고 과반수를 차지하던 상놈들은
감히 제사를 지내면 태형이었죠.
제사 역시 경국대전의 예편에서 대상을 정해놓았으므로
천민이 하면 양인이나 양반 흉내에 해당되므로 태형이었습니다.
심지어 중인도 제사를 지낼 수 없었죠.
말 그대로 정한수나 밥 한공기를 떠놓는 수준인데
이정도는 당시 가택신에게 하던 수준이었거든요.
결국 우리가 오늘날 제사라고 하는 제사를 했던 것은 양반들 약 10%에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법적으로 주자가례에 의해 엄격한 제사 양식을 지킬 것을 강요했으니까요.
잘 읽었습니다
from CLiOS
http://www.root.or.kr/equality/jesa/history.htm
퇴계 이황 선생도 증조부 묘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라서 평생 찾아다녔다고 하죠. 조상에 대한 숭배가 집단적으로 형식화한 것은 확실히 조선후기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