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에 와서 아침잠이 없어졌습니다. 아마도 먹는 양이 적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들더군요. 기껏해야 맥주 한 캔, 수박 한 조각으로 끼니를 해결하다보니 소화에 들어가는 수고가 적어서겠죠. 한편으로는, 한국에서 참 많이 먹고 살았구나 싶었습니다.
바간에서의 둘째날은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 네시에 일어났습니다. 창밖으로 하늘을 보니 일출 따위는 없을 것 같았지만, 일단 난민타워에 다시 가보기로 했습니다.
잠이 덜 깬 상태로 바이크에 올랐습니다. 본의 아니게 익숙해진 탓에 - 어제밤 폭우속에서 동네를 세바퀴나 돌았었죠 - 헤매지 않고 2번국도로 들어섰습니다. 해가 뜨기 전의 길은 어둑했지만 적지 않은 바이크와 트럭들이 달리고 있었습니다. 앞질러가는 트럭 짐칸의 스님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고개를 숙여 인사하니 합장을 해오셨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예상대로였습니다. 한 시간을 달려갔지만 하늘은 흐리기만 했습니다. 일몰이 없었으니, 일출도 없었습니다. 늘 동경하던 바간의 풍경 중 하나를 끝내 못본다는 생각에 우울해졌지만, 이렇게 다시 와야할 이유가 생겼네, 생각하며 기운을 냈습니다.
호텔로 돌아와 식당으로 갔습니다. 중국풍과 일본식이 뒤섞인 분위기의 식당에는 네 종류의 빵과 버터, 볶음국수, 프라이드에그, 햄, 짜조, 과일과 커피, 오렌지 주스가 놓여있었습니다. 빵은 부드럽고 버터는 진한데 딸기잼이 너무 달고 셔서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커피는 그다지 감동적이지 않았구요.
다시 짐을 챙겨 바이크에 시동을 거니 배터리 경고등이 들어왔습니다. 어제의 폭우 탓인가, 분명 새로 바꾼 건데 또 방전이었습니다. 바퀴를 질질 끌며 바이크샵으로 갔습니다. 배터리가 없어요. 주인아주머니는 다행히 내 얼굴을 못알아보는 것 같았습니다. 이번에는 아주 깨끗한 바이크를 하나 꺼내주셨습니다. 벌써 세 대째 교체한 바이크는 예쁜 흰색이었습니다. 우와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2번국도로 향했습니다.
고작 이틀뿐인 일정이지만 대충 둘러볼 생각은 없었습니다. 바이크를 타고 구글맵에 표시해둔 사원과 탑들을 꼼꼼히 짚어나갔습니다.
어제의 첫 사원을 지나자마자 우측으로 보이는 나가욘 사원으로 들어섰습니다. 11세기 후반 세워진 사원은 두겹으로 된 입구와 부처를 보호하는 거대한 뱀 - 아마도 나가겠죠 - 으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네 방향의 부처를 뵙고 돌 위에 잠든 멍뭉이를 들여다보다 바이크로 돌아갔습니다.
다시 바이크를 달려 마누하사원이 있는 마을을 지나 몇 개인가의 사원들을 돌아보고 밍갈라 제디 파고다의 정문으로 향했습니다. 어제 반대 방향에서 봤던 정문은 굳게 닫혀있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폐를 끼쳤네, 고개를 숙이고 올드바간 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본격적으로 파고다군이 나타났습니다. 좌우 어디를 돌아봐도 온통 파고다였습니다. 과연 천 개의 탑이 맞구나, 감탄하며 조금 키가 큰 파고다에서 내려다보니 지평선까지 수없이 파고다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이 많은 파고다를 다 보려면 한 달은 머물러야할 것 같았습니다. 이래서야 끝이 없겠네, 고개를 저으며 바이크로 돌아갔습니다. 별 수 없이 큰 곳 위주로 봐야겠네, 짯빈뉴와 슈웨구지 쪽으로 향했습니다.
12세기에 세워진 짯빈뉴 사원은 높이 64m로 바간에서 가장 높은 사원입니다.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슈웨구지로 다가갔습니다. 바간에서도 일출, 일몰 포인트로 유명하다더니 슈웨구지 역시 꽤나 높고 큰 사원이었습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난간에 앉아 쉬던 기념품 아주머니들이 다가왔습니다. 타나카[주] 발라줄까? 분통처럼 생긴 타나카를 들고 다가오는 아주머니를 피해 뒷걸음질을 쳤습니다. 아, 왜, 이쁠 것 같은데. 계속 어색해서 아하하 웃으니 뒤에서 구경하던 노점상 아주머니들이 다같이 따라웃었습니다. 나중에 해볼게요, 손을 저으며 뒷걸음질을 치자 오케이, 오케이 아주머니가 짖궂게 웃었습니다. 유쾌한 분들이구나, 손을 흔들고 사원 안쪽으로 들어갔습니다.
네 방향의 부처를 뵙고 바람이 불어오는 통로에 앉으니 난간에 새와 다람쥐가 보였다. 뭘 하는 걸까 유심히 보니, 둘 사이에 밥이 놓여있었습니다. 아마도 사람이 준 것 같은데, 그 밥을 새와 다람쥐가 나눠먹고 있었습니다. 새가 먹으면 다람쥐가 기다리고, 다람쥐가 먹으면 새가 기다리면서요. 너희들, 서로 공양하는거냐. 뭔가 머리속이 혼란스러워져서 멍하니 쳐다봤습니다. 문득 고개를 들어 멀리 보니 짯빈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슈웨구지를 나와 계단을 내려오니 상점들이 보였습니다. 어제 산 Japanese Quality라는 바지는, 폭우속에서 이미 찢어져버렸습니다. 아무래도 몇 벌 더 있어야 할 것 같아 옷가게 앞을 두리번거리는데 젊은 아가씨가 뛰어나왔습니다.
바지 필요하구나?
맞아.
이리 와봐. 좋은 걸로 줄게. 이거 너한테 어울릴 것 같아.
어디 보자, 이거 얼마 짜리야?
육천. 하지만 두 개 사면 깎아줄게.
좋아. 다른 것도 보여줘.
이거 어때? 이거 잘 어울린다.
아, 사실 난 보라색을 좋아하지 않아.
왜? 보라색은 행운의 색이야.
하지만 난 싫어.
다들 보라색을 좋아해!
... 너 사실 다른 색 바지 없지?
아냐, 아냐, 저 뒤에 있어.
이거 봐, 많이 있잖아. 보라색이 좋은 거여서 추천한거야.
하하, 알겠어. 이거 두 개 살게. 검정색과 파란색.
하나 더 사. 세 개 만팔천이지만 깎아서 만육천에 줄게.
난 두 개면 돼.
하지만 세 개에 겨우 만육천인데? 아냐, 만오천 어때?
난 두 개만 필요해. 두 개 살게. 얼마야?
만이천.
너 아까 깎아준다고 했잖아. 일만에 줘.
만천, 플리즈. 응?
...알았어, 만천.
고마워. 넌 좋은 손님이야. 친절한 사람이네.
좋은 바지 고마워. 근데 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
물론, 한 장에 천이야. 하하.
하하. 정말?
농담이지. 하하.
안녕, 이제 갈게. 좋은 하루 보내길 바래.
그래, 너도 좋은 하루.
안녕.
손을 흔들고 가게를 떠났습니다.
[주] 타나카는 미얀마인들이 이마와 뺨, 콧등에 바르고 다니는 천연 자외선 차단제입니다. 오렌지재스민, 코끼리사과나무 등을 돌에 갈아서 가루를 낸 뒤 물에 섞어 바르는데, 나무 자체도 타나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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