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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도 모르게 빠져있는 박정희 향수, 그리고 대구의 지식인" |
인혁당 조작사건 희생자 대부분이 대구와 연관이 깊다. 그들의 희생은 대구 주류양심세력의 소멸 내지 침잠이란 측면에서 큰 영향을 끼쳤다.
2.28을 낳은 대구는 4.19이후 사회운동이 활발했다.
61년 5월1일 전국처음으로 노동절행사를 대구에서 갖기도 했다.
5.16이후에도 계속됐다. 63년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시위에도 적극 참여했다.
그후 중앙정보부는 64년 8월 북한의 지령을 받고 국가변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의 인혁당사건을 발표한다.
(이 사건은 그로부터 10년 뒤 다시 악용됨에 따라 제1차 인혁당사건이라 불린다)
여기에도 도예종씨 등 대구인사들이 포함돼있다.
72년 10월 유신선포이후73년 10월 서울대에서 처음으로 유신반대시위가 일어났으며, 대구를 비롯 전국으로 확산됐다. 74년 4월긴급조치4호가 선포돼 민청학련이 범죄단체로 규정되고 그 배후로 인혁당재건위원회(이를 인혁당재건위사건 또는 제2차인혁당사건이라 부른다)가 지목된다.
관련자 23명에게 징역15년에서 사형까지 중형이 선고된다. 75년 4월8일, 사형이 선고된 8명에 대해 대법원은 상고기각결정을 내린다. 다음날인 75년 4월9일 새벽 사형이 집행된다. 김용원 도예종 서도원 송상진 여정남 우홍선 이수병 하재완씨 등 8명의 민주양심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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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대부분은 향토 대구 또는 경북 또는 대구 인근 경남출신이며 향토 영남대(옛 대구대.청구대) 또는 경북대를 졸업 또는 수학하고, 대학강사 초등교사 학원강사 양조장 건축업에 종사한 평범한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반대하고 장기집권 유신을 반대하는 양심세력이었다. 북한의 지령을 받고 국가변란을 기도한 간첩은 아닌 것이다.
같은 향토출신의 박정희 정권은 왜 이들을 죽였나.
향토출신을 대거 요직에 기용하는 등 당근정책을 구사하면서도 이들 향토출신에게 인혁당이란 틀을 덮어씌어 죽였을까. 향토에는 장기집권을 저해하는 그 어떤 세력도 용인하지 않는다는 결심이 작용한 것인가. 또 전국적 거물급 대신 향토의 평범한 양심세력, 그래서 잘 모르는 이들을 희생시킴으로써 다른 지역의 유신반대시위나 운동도 잠재우려 한 게 아닌가.
인혁당조작사건은 대구 민주양심세력에 대한 선택적 고엽제 살포였다.
이 고엽제는 민주양심세력만 선택해 고사시킨다. 그후 대구는 대학생을 제외한 양심세력들이 기를 펴지 못하게 됐다. 처자식이 있는 이들은 까딱하다가는 제3 제4의 인혁당에 몰려 하루아침에 참살당하는 꼴이 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날이후 의기를 접거나 동조하거나 외면하는 양상으로 변해버렸다. 반면 ‘정권창출’ 지역답게 권력을 누리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박정권의 뜻대로 인혁당에 관련된 그들은 그렇게 유언도 없이 사형을 당했고 유족은 그날이후 ‘빨갱이’의 아내 및 아들 딸이 되어 온갖 고통을 겪어야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의 고통을 알아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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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ohmynews.com/NWS_Web/View/ss_pg.aspx?CNTN_CD=A0002116044
결과적으로 대구의 기백을 죽인 박정희 정권의 인혁당 용공조작 사건
경제발전이라는 화두가 박정희 대통령이 대구에 내민 당근이라면 지난 5월 31일 대법원에서 반세기 만에 무죄 확정된 두 차례 인혁당 사건은 채찍이었다. 중앙정보부에 의해 엮인 자들 가운데 도예종 송상진 여정남 씨 등 대구경북 출신들이 많은 것에서 보듯 대구의 기백을 결과적으로 꺾으려 박정희 정권이 만든 용공조작사건이었다. 두 차례에 걸친 기습 공격으로 대구의 정신은 결국 꺾여버렸다. 특히 2차 공격은 1차 공격으로도 꺾이지 않는 대구 주류 양심 세력에 대해 극단적이고 충격적인 방법(사형선고 18시간 만에 사형집행)을 쓴 확인 사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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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꺾여버린 대구는 박정희 신화 그 박정희교의 신도가 되어갔고, 박정희의 깃발만 꽂으면 막대기도 당선된다는 몰이성적 지역으로 굳어져 버렸다. 그렇게 형성된 대구의 정치적 단일 지배 구조는 지역사회를 경직시키는 가장 근본 원인이 되었다. 대구의 정치·행정 권력이 단일 정당에 의해 장악되면서 시민사회의 정치∙행정 권력에 대한 견제를 취약하게 만들었다. 도시의 창조성과 시민적 생명력을 죽이는 경직성은 경제적 침체까지 가져와 대구는 16개 시도 중 지역총생산(GRDP)이 꼴찌를 달릴 만큼 지역경제도 바닥을 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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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시기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이 가장 많았던곳이 대구,경북이었죠. 해방정국 시기~제2공화국 시기까지만해도 대구는 진보,혁신세력에게 있어 아주 인기많았던곳이었습니다. 제1공화국 시기 반(反) 이승만 감정이 제일 심했던곳이자, 조봉암에 70%이상 몰표해줬던곳... 제2공화국 시기 존재했던 진보,혁신 정당이었던 사회대중당이 인기가 굉장했었죠.(제2공화국 시기 신문들보면, 무슨 대중적인 집회있다하면 대구에서만 4~5만명이 참가했을정도..) 그리고 교원노조(오늘날로치면 전교조의 아버지)가 결성되었던곳 역시 대구였죠....
그런 대구가 '박정희교' 정도급으로 변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인혁당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의 의미가 엄청나게 큰 것이 박정희가 자기 고향에 있는 진보,개혁 지식인들 향해 '간첩'으로 몰아 때려잡고 민주 인사들 및 비판적 지식인들 초토화시켜버린 사건입니다.(인혁당 사건때 연루된 사람들 전체에 8~90%가 영남 출신이었고, 사형당한 8명의 희생자들 전부 영남 출신. 그 가운데 4명은 대구,경북 출신으로 거주자. 나머지 4명도 서부경남 출신-서부경남은 생활권이 대구,경북권이죠-) 이 사건 전후로 대구에서 '비판적인 지식인'들, 민주,개혁,진보쪽 사람들이 상당히 치명타를 당했습니다. 인혁당 사건 전후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지식인'들 모습은 상당히 사라졌다는것..
박정희가 작정하고 '고엽제'를 살포한것이죠. 이 고엽제는 오늘날도 계속 유효하고 있다는것..
5.18 학살당한 광주는 지금 어떤가요?
정의를 찾아 노력했으면 지금 Tk꼴은 안났을듯
초엽기님....그렇죠...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습니다.
광주와 TK경우는 약간 선이 좀 다릅니다.
광주는 짧은시간내에 그렇게 된 경우이고, TK는 긴시간에 그렇게 된 경우라서,
이렇게 얘기하기가 좀 애매할 수 도 있는거 같은데, TK는 좀 각인이 된 듯한 느낌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광주는 큰홍수가 나서 한방에 내 모든것이 사라졌다면,
TK는 큰사건이 하나 터지고, 그일에 대한 조사를 몇날 몇일을 계속하고, 서로를 고발하라는 압력이 몇년이나 지속되는 그런 경우라고 생각됍니다. 결국은 흑백으로 나누어서, 무조건 많은 수의 색을 선택하라는 압력속에서 시간을 보내게 됐죠.
적은 수의 색을 선택하면, 어떤 응당한 댓가를 받을게 분명하니, 그러지 못할 거구요.
이게 색을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많은사람이 선택한 쪽을 선택해야 안전한 삶이 보장돼니, 그렇게 된거 같습니다.
글로 표현을 하기가 정말 힘드네요. 생각을 정리해서 글로 나타내야 하는데,
변변치 못한 글로 혹 더 오해하기 쉬워지면 어떻하나 무섭네요.
TK가 그렇겠죠. 핑계겠죠....(휴~~~~~~핑계란 말에 철렁했습니다.)
어라2님도 최대한 표현의 절제를 하면서도 핵심을 집어주셨네요.
짧은시간에 팍 기를 죽이는것은 ,그 순간이 지나길 기다리면 반동할수있는 준비력이 있지만 긴시간동안 두도보면서 긴호흡을 하지못하도록 핍박하는것은 ,정말이지 혼이 말살될 정도로 복수의 안간힘마져 소멸시킬수 있습니다.
님의 말씀에 공감하고,대구쪽사람들 어쩌다 만나는 사람들중 현정권에 핏발 세우며 농 염색된 사람들 보면 안탑깝네요.
그렇게 처절하게 긴시간동안에 생명, 존심 ,호흡살리기,위한 안간힘속에서 모든걸 포기당한 이들의 후손같아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