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오래간만에 인사드리네요.
악마가 쓴 “지옥에서 꾸며진 책”이라는 부제가 마음에 들어서, 그리고 스피노자에 대해 관심이 있어서 선택한 책이었는데 쉽사리 책장이 넘어가는 책이 아니었네요. 때문에 피상적인 수준에 그쳤지만 이야기 해보고 싶은 부분을 발제문으로 작성해 보았습니다.
1. 가장 인상깊었던 사항이나 관심있게 읽으신 부분, 책에 대한 감상 등에 대해 이야기 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2. 스피노자는 성경이나 종교지도자들에 글이나 말에 복종하는 것이 종교가 아니라고 하면서이성의 인도를 따르면 신을 사랑할 수 있고 신의 섭리가 자연의 보편적인 인과율적 결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스피노자의 이러한 생각에 따르면 기하학적 논리에 따라 진리를 탐구하고자 하는 철학자(또는 과학자)의 개념에 가까운 듯한 느낌인데 이렇게 이성의 인도를 따라 신을 이해하고자 하는 자를 동양의 성인군자와 가깝지 종교인 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스피노자가 무신론자라고 당시 많은 사람이 이야기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스피노자는 “이성으로 덕을 쌓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대중에게는 버겁다. 이것이 성경이 필요한 이유이다.” 라고 이야기 하기도 하였습니다. )
3. 종교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간, 종교가 서로 다른 사람간 충돌없이 공존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랍과 이스라엘간 갈등, 유럽에서의 아랍계와 비 아랍계간 갈등, 우리나라에서의 종교신자와 비신자간 갈등 등을 고려한다면 ‘참된 종교’라고 생각하는 것을 변호하고자 했던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은 의미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4.이 책을 읽고 나서 신학정치론에 대한 관심이 생기셨나요?
신학정치론이 쓰여질 당시에 정치 및 사회에 있어서 절대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종교의 힘이약화된 지금 이 시대에도 이 책이 의미를 지닌다면 어떠한 것이 있을까요?
지금 이 시대에 시장만능주의 등 절대적(?) 위치-과거의 종교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상이나 관념을 종교의 위치에 놓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도 같습니다.
만일 스피노자가 이 시대를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요?
그럼 토요일에 뵙겠습니다.
<참고자료>
<신학정치론 출간(1670년) 당시 시대 주요 사건> • 1603년 - 일본에서 에도 막부가 수립되었다. • 1608년 - 조선 14대 국왕 선조 승하. 조선에서 15대 국왕 광해군이 즉위하였다. • 1612년 - 신성 로마 제국에서 합스부르크 왕조의 마티아스가 즉위하였다. • 1618년~48년까지 - 독일에서 30년 전쟁이 발발했다. • 1619년 - 신성 로마 제국에서 합스부르크 왕조의 페르디난트 2세가 즉위하였다. 네덜란드가 현재의 자카르타에 바타비아라는 식민 도시 건설. • 1620년 -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북아메리카의 매사추세츠의 플리머스에 도달 • 1621년 - 234대 교황 그레고리오 15세가 즉위하였다. • 1623년 - 4월 12일 조선에서 인조반정이 발생하여 16대 국왕 인조가 즉위하였다. 8월 6일 235대 교황 우르비노 8세가 즉위하였다. • 1636년 - 조선에서 병자호란이 발발했다. • 1637년 - 1월 30일 조선에서 삼전도의 굴욕을 끝으로 병자호란이 종결되었다. 2월 15일 신성 로마 제국에서 합스부르크 왕조의 페르디난트 3세가 즉위하였다. • 1644년 -동아시아의 거대국 명나라가 멸망하였다. • 1648년 - 베스트팔렌 조약 체결. 30년 전쟁이 종결되었다. • 1649년 - 조선 16대 국왕 승하, 조선에서 17대 국왕 효종이 즉위하였다. • 1659년 - 조선에서 18대 국왕 현종이 즉위하였다. • 1667년 - 238대 교황 클레멘스 9세가 즉위하였다. • 1670년 ~1671년 - 조선에서 경신대기근이 발생했다. • 1674년 - 조선에서 19대 국왕 숙종이 즉위하였다. |
<스피노자의 일생> 1632년 포르투갈에서 가톨릭 교회의 종교재판과 유대인 탄압을 피해 망명한 유대계 상인인 아버지 미겔 지 이스피노자와 어머니 아나 데보라 이스피노자 사이에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다. 그의 친할머니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 마녀로 몰려 화형을 당했다. 스피노자는 5세 때에 유대인회 에츠 하임에 등록되어 탈무드 학교의 랍비 사울 레비 모르테이라 밑에서 유대 철학과 신학을 전수 받은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가 1654년 사망하자 21세의 스피노자는 아버지가 경영하던 수입 상품점을 물려받았다. 아라비아와 르네상스, 데카르트 등의 사상(思想)의 영향을 받아 1651년경부터 독자적인 사상을 갖게 되고 유대교 비판과 신을 모독했다는 구실로 가혹한 탄압을 받고 추방되며 1660년경 다음과 같은 저주의 파문선고를 받는다. "천사들의 결의와 성인의 판결에따라 스피노자를 저주하고 제명하여 영원히 추방한다. 잠잘 때나 깨어있을 때나 저주 받으라.나갈 때도 들어올 때에도 저주받을 것이다. 주께서는 그를 용서 마옵시고 분노가 이 자를 향해 불타게 하소서! 어느누구도 그와 교제하지 말 것이며 그와 한지붕에서 살아서도 안 되며 그의 가까이에 가서도 안 되고 그가 쓴 책을 봐서도 안 된다" 1660년 라인스부르크에서 <지성 개선론>을 저술, <데카르트 철학의 여러 원리>를 출판하였다. 1663년 포르부르크에서 네덜란드 공화국의 정치적 지도자 얀 드 비트와 사귀었다. 1670년 <신학 정치론>을 익명으로 출판하였다가 비난을 받았다. 도처를 돌아다니며 살던 그는 그 해 헤이그로 정착하여, 1675년 필생의 저작인 <윤리학>을 완성하였으나, <신학 정치론>의 악평 때문에 생전에 출판하지 못하였다. 이 책은 기하학의 논증법을 응용하여 윤리학을 정리, 공리계(係) 등으로 체계지운 것이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안경 렌즈를 연마(硏磨)하는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가운데서도, 당시 독일 최고의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부터 초빙을 받았으나 자유로운 철학활동을 보장하지 않는 곳에서는 재직할 이유가 없다면서 이를 단호히 거부하는 등 철학자로서의 교훈이 되는 숱한 일화를 남겼다. 그는 처절한 고독과 빈곤 속에서 과로로 인한 폐병으로 <국가론>을 최후의 저서로 하여 44세를 일기로 일찍 숨을 거두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