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교차 20도, 짙은 안개, 그리고...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 김승옥 '무진기행'
소설 '무진기행'의 배경이 순천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순천과 지척인 고흥의 겨울 들판에서 차고 축축한 바닷바람이 두텁게 빚은 안개를 만났습니다. 들판과 얕은 언덕을 가득 채운 안개 사이로 햇살이 드는 모습은 장관이었습니다. 푸른 댓잎 동백잎, 마른 풀잎에 온통 서리가 내려 유리처럼 빛납니다.
'오... 멋지다' 생각에 넋을 놓고 길바닥을 외면하고 달리는 동안 어김없이 그 분이 찾아왔고요. 출발한지 20km를 갓 넘겼는데 말입니다.
풍경에 잠시 한눈을 팔았을 뿐, 스네이크 바이트가 나도록 달리지는 않았기 때문에 분해한 타이어를 빼낸 뒤 안쪽을 꼼꼼히 훑었습니다. 역시 작은 쇳조각이 삐죽 박혀있었습니다. 이물질을 제거하고, 부적처럼 2년을 지니고 다닌 새 튜브를 끼워넣습니다. 손이 제법 시린게 평소보다 작업 속도가 나지 않습니다. 가민을 살펴보니 영하 5도가 찍혔습니다. 일기예보에 찍힌 숫자와 관계없이 풀 동계복장을 하고 나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아침 11시께부터 영상 15도로 치솟는 바람에 욕을 하면서 껍질을 벗어 짐받이에 달아야 했습니다. 물론 이 껍질들은 저녁 7시 이후로는 다시 도움이 됐고요.
조상님들의 날카로운 분석력
고흥현(高興縣)은 본래 고이부곡(高伊部曲)이다. 고이란 방언으로 고양이[猫]이다. -국사편찬위원회 '고려시대 사료'
이번에 새삼 깨달은 사실인데, 인구 대비 고양이가 정말 많습니다. 출발 전날 고흥만방조제에서 밥하는 동안 고양이들이 베이컨 냄새를 맡고 텐트 안으로 들어오려고 해 막아야 했고 (자려고 누우니 한동안 텐트 주변을 맴돌며 냥냥거렸고) 나로도에서는 편의점 접대냥이를 만났고... 받는 만큼 되갚아주는 사람이라 다 고양이 확대로 보복했습니다.
고흥 고양이들은 달리는 동안에도 자주 보였는데, 댕댕이와 달리 냥냥이는 알아서 피하는 쪽이기 때문에 아무 탈도 없었습니다. 참고로 나로도 인근에는 쑥섬이라고 국내 유일의 고양이섬이 있습니다. 코스와는 상관없는 곳이니 별도 스케줄이 없으면 들르기 쉽지 않겠죠.
고흥만방조제로 향하는 다운힐 초입 카페를 지날 무렵 댕댕이가 꼬리치면서 짖길래 멈춰서 불렀더니 와서 인사해주고 갔습니다. ㅎㅎㅎ 뷰가 좋은 곳이라서 한번은 가고 싶은 곳인데, 항상 아침에만 지나서 아쉽고요.
남도의 먹거리
잦은 장거리 투어는 '영혼의 힐링'인 동시에 '통장은 킬링'이라서 점점 캠핑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꼭 비용 때문은 아닌 것이 가끔 딱딱한 바닥에서 별 보면서 자면 기분이 조커든요.
라이딩 전날 밤엔 고양이들 사이에서 텐트를 펴고 자면서 농협에서 구입한 베이컨과 김치를 넣어 라면을 끓여먹었고(베이컨의 절반은 냥냥이들에게 상납했으며....) 라이딩 당일에는 돌아다니면서 부족함 없이 먹었습니다. 해산물을 좋아한다면 녹동항 장어거리는 천국이고요. 물회를 좋아하지만 배가 출렁거릴 거 같아서 후딱 먹고 치울 수 있는 회덮밥(1.2만원)을 먹었는데, 시원한 지리까지 넉넉히 줘서 만족스러웠습니다. 블레어님이 출발 전날 들른 기사식당도 예전에 비해 가성비가 낮아졌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꽤나 괜찮습니다.
시간을 덜 쓰기 위해, 경로상 다른 보급포인트가 없어서, 카드 받는 곳이 없어서 편의점 식사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끼의 든든함' 을 따지면 식당밥이 좋더라고요. 사실 부족함 없이 먹은 음식의 상당수가 편의점 삼김이나 햄버거였고, 이거 아니었으면 타임오버로 완주 못했을 겁니다.
라면하고 물회가 정말 먹음직스러워보이네요.
장거리 탈 때 식당에서 조금 여유롭게 먹으며 다리를 좀 쉬어주면 편의점에서 빨리빨리 먹고 가는 것보다 한결 편했던 것 같습니다.
아침은 평소에도 간소하게 먹기 때문에 나와서 점심 저녁은 어지간하면 잘 챙겨먹자는 주의입니다만 이번엔 저녁만큼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가도가도 무인지경이라서... 그리고 사진은 물회가 아닌 회덮밥입니다.
종잇장 내구성으로 악명이 높은 비토리아 코르사인데, 5000km 넘어서 처음으로 펑이 나네요.
현-_-님이나 저나 물회와는 상관없이 이미......걍 먹읍시다 우리!
그나저나 이리 추운데 대단하십니다.
날은 꽤나 따뜻했습니다.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했지만 낮엔 3월 브레베 느낌이었어요.
풀 장착한거 하나씩 풀어가며 뭘쌌는지, 어떻게 쌌는지 한번 보고 싶네요.
하지만 상상만입니다. 실현하려면 쫓겨날 각오를 해야해서 말이죠^^.
현재 상황이 나아져서 꼭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다음 번엔 일정이 맞아 떨어져서 함께 오붓하게 즐겁게 신나게 달리죠. :-)
안전하게 다녀 오셨다니 다행입니다.
가끔은 코스내에 있는 식당에서 여유롭게 드시는 것도 좋죠
먹는것도 여행의 소중한 일부분이니깐요